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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판타지

1화

 

"젊은이, 자네도 제법 대담하군"
아른거리는 샹들리에의 양초 불빛이 고풍스러운 방을 고상하게 적신다. 고전적으로 장식된 흰 대리석 방은 단 한명의 사람이 묵기엔 지나치게 큰 방이나 묵고 있는 자의 위용을 본다면 결코 크다고 할 수 없었다. 거대한 창문밖으로 내다보이는 가는 그믐달의 모습은, 별하나 뜨지 않은 쓸쓸한 밤하늘을 유유자적하게 거니는 나그네의 모습은 분위기를 더욱 적나라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고상함은 곧 피로 장식되어질 것이었다.
"당신만 한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만남을 나누는 기준을 원한으로 한다면 원한이 있는 사람과 원한이 있는 사람, 원한이 없는 사람과 원한이 있는 사람, 원한이 없는 사람과 원한이 없는 사람으로 나눠질 것이다.
물론 가장 나쁜 결과를 낳는 경우는 첫번째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원한이 없는 사람과 원한이 없는 사람의 만남에서 비극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전장의 두 군인의 경우가, 서로 사상이 다른 두 사람의 경우가, 그리고 살인마와 피살자의 경우가 좋은 예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세번째 경우이기에 썩 좋은 일은 아닐 수 밖에 없었다.
"난 확실히 죽을 목숨이지만 자네는 지금 여유를 부리다 죽을지도 모르는 목숨 아닌가."
살인마는 피살자의 대답에 실소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한번 흔든 후 미소지으며 말했다.
"정말 못당하겠군요. 당신이 이제껏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사람인것 같습니다."
피살자는 살인마와 반대로 큰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한껏 비웃는것처럼 들리면서도, 진정 즐거워 웃는 웃음과도 같이 들렸다. 피살자는 살인마에게 말했다.
"빨리 이 늙은 몸과의 인연을 끊게 해주게."
"그전에, 하나만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무엇을 말인가?"
"기분이 어떠십니까? 곧 쌓아온 모든것들이 무너질 것이란 기분은?"
"하하하...알아서 무얼 하겠는가?"
자수된 흰 양탄자를 따라 피살자는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전체적으로 나긋나긋하면서도 한걸음 한걸음은 딱딱한 그 발걸음은 피살자가 발걸음 까지도 신경쓸 만큼 여유있음을 보여주었다. 바로 창문앞에 선 피살자는 고개를 들어 달을 보았다.
"저 푸른 달과 같은 기분이라네."
"대단한 시를 쓰시는군요. 그렇게 말하시면 제가 임의로 해석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달에 비유하는것보다 직접 말하는게 더 효과적일것 같다면 구태여 그리 말하지도 않았네. 마침 달도 그믐이 아닌가. 끝나가는 인생에 빗대긴 더없이 좋은 존재지."
"정말 재미없는 비유로군요."
살인마는 품속에서 한자루의 수총을 꺼내들었다. 그는 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제 인생은 이 총과 같겠군요."
"묻지도 않았네만."
"당신, 의외로 재미 없으신 분입니다."
피살자는 뒤돌아 살인마를 바라보았다. 슬프게 웃는 그는 애수어린 표정을 하고있었다.
"끝날때조차도 근심없이 끝나지 못하는건가."
"글쎄요....... 어차피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을 잊을텐데 말입니다."
미동도 하지 않던 피살자는 살인마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끝나고 나면 영원히 뜨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초승달이 돼서 다시 떠오를 것인가. 평생의 근심거리였지.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단순한 근심거리는 아닌것 같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번엔 살인마가 몇걸음 다가갔다. 그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저야 당연히 전자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다시 뜨지 않는 것이 꼭 유쾌하지 못한 것만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잊어도 허무하지 않은가?"
"모든 것들이 무너질 것이란 것을 알 때의 기분이 어떤가, 라는 질문을 제가 돌려받게 된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살인마는 사뭇 진지해졌다. 그의 눈은 갑자기 열망적이 되었고 눈동자는 가볍게 흔들렸다. 그는 진지하다 못해 분노에차 노려보는듯 느껴지는 눈빛으로 피살자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당신은 어째서 살아가십니까?"
"자네, 오늘밤 안에 나를 죽일수 있기는 하겠나. 이야기를 너무 크게 만드는것 아닌가."
"어째서 살아가십니까?"
피살자는 다시 돌아서 달을 보며 말했다.
"태어났기 때문에 살게되었고, 사람이 있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살아왔다."
"변함없이 빗대어 표현하시는군요. 그렇지만 제 의도와 비슷한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태어났기 때문에 살게 되신 겁니다. 그럼 태어나기 전의 순간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존재했던 시간과 비교도 안될만큼 긴 시간에 당신의 존재 이전에 흘러갔습니다. 그 시간이, 당신에게 허무감을 주었습니까? 고통을 주었습니까?"
"궤변을 하지는 말게. 허무감을 알기 전의 시간을 나에게 들먹이지 말게."
살인마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이번엔 비웃는듯한 웃음이었다.

"당신과 저는 생각이 조금 다른듯 하군요. 저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그 다른 생각을 단순한 젊은이의 치기로 치부하진 않는다네. 좀더 정확히 말해주게."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허무하지 않습니다. 생존하는 기계에 불과한 삶입니다. 삶이라는 굴레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제법 유쾌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처럼 멈추지 않는것보단 낫습니다."
"자네의 생각, 쌓아올린 것들, 그러한 것들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 해도 상관 없다는 것인가? 확실히 나와 생각이 다른 점은 인정해야 겠어."
가만히 수총을 내려다 보던 살인마는 피살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에게 총구를 겨눴다. 그리고 웃었다.
"당신같은 생각이 자연스러운 생각이지요."
"말 많은 살인자였어, 자네. 살인자로서는 실격인것 같은데 말이야."
"신경쓰지 않아 주셔도 됩니다. 아쉽지만 이제 당신을 못보겠군요."
"희극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내가 듣게 된다는 것은 꽤나 특이한 경험이군. 마지막으로 이름이나 알려주게."
"이현이라고 합니다."
피살자는 다시 살인마를 돌아보았다. 이현은 피살자에게 겨눈 총을 점화했다. 치직거리는 소리가 멈춤과 동시에 피살자의 생명도 끝날 것이리라. 피살자는 죽음의 손길에 몸을 내밀었다. 기분나쁜 소리와 함께 총탄은 피살자의 뇌수를 파고들었다. 외마디의 단말마가 울려퍼졌다. 너무나 익숙한 소리이기에 이현에게 있어선 무미건조한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정신은 모르더라도, 그의 육신만큼은 이제 영원히 안식을 취할수 있을 것이리라.
이현은 망자에 대한 작별 인사 하나 없이 방을 장식한 양초 하나를 집어들어 양탄자 위에 떨어뜨렸다.
총소리를 누가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반격해올것 같지도 않은 상대였기때문에 총으로 쏜 것이 갑자기 후회되었다. 사실 나이프로 목을 긋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일이었기에 이현은 마냥 후회하고 있을수는 없었다. 죽이기 전처럼 여유를 부릴시간은 없다. 이현은 창문쪽으로 뛰어가 유리를 깨뜨렸다. 시끄러운 소리가 났지만 총소리보다는 작은 소리일 것이다. 일층이라고 해도 다른 건물보다 반층은 더 높은 높이였기에 뛰어내리기가 부담스러웠지만 누군가에게 들켰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뛰어내려야 할것이다. 유리 파편에 의해 곳곳에 상처를 입었으나 생각치 않고 뛰어내렸다.
착지할때의 충격으로 한번 넘어졌다. 그러나 이현은 가능한 빠르게 자세를 회복했다. 무릎이 아플법도 했으나 느껴지는 것은 싸늘한 밤공기 뿐이었다. 그리고 이현은 최적의 경로를 그렸다. 성 근처에는 몸을 숨길만한 장소가 없으니 일단 마을 쪽까진 가야만 했다. 이현은 불타는 방을 뒤로 하고 대기시켜놓았던 말에 서둘러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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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돌아온 소설입니다! 사실 원래 1화는 이것보다 길게 잡았지만, 그저 잡담이나 하자는 취지에서 좀 분량을 줄여서 올려봅니다.

소설의 주제는 제법 심오하게 잡았으나 제 필력과 근성이 따라가줄지 의문이군요.

핵심 주제를 무신론으로 잡은 소설도 한번쯤 써보고 싶어져 그럽니다. 무신론자라 하고 다니지만 실제로 할만한 활동은 적은것 같아서요.

1화부터 주제를 팍팍 드러냈으니, 제입으로 주제를 말해도 상관은 없겠죠.

 

2편은 뚝 끊어지지 않고 말에 탑승한뒤 추격하는 장면으로 바로 이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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