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지 않기에 여기에 전부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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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강제적 권고사직으로 받은 퇴직금은 3억이 넘어갔다. 처음에는 이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아서 회사에 전화했더니, 여태까지 월급의 미지급금까지 합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미지급금의 80%가 야근수당이었는 점에서 두 번 놀랐지만 여하튼 3억을 받았으니 좋은 것이다.
내가 다니던 곳은 10년 전부터 뜨기 시작한 '안드로이드'라는, 인간형의 로봇들을 개발하는 회사였다. 그곳에서 갖가지 미적 요소들을 더해 안드로이드의 모델을 그리고, 부품들을 배속하고, 마케팅 기획을 짜는게 나를 포함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는 업무였다.
...라고 해도, 이제 그런 회사들은 슬슬 줄어들 때라고 한다. 안드로이드는 너무 많아졌고, 자원은 점점 비싸져만 가고 있었다. 멀쩡한 안드로이드 하나를 사기 위해서는 대략 천만원 정도의 값이 필요했으나(물론 용도와 기능에 따라 억대 단위로까지 뛰었다), 요 몇달 사이에 그 값이 4~5배 가까이 폭등하는것도 어찌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전철에 타고, 정거장을 수도 없이 지나며 집에 가는 길은 한산하고 여유로웠다. 모두가 일할 시간에 큰 종이박스를 든 채 전철을 타고 있으니 이유모를 비참함을 느꼈다. 일을 쉬어야할지 말아야할지도 모르겠고, 사직했다는 것도 믿겨지지 않았다. 이제 서른이 조금 넘었을 뿐이라 앞날이 창창한데도, 속 언저리에서는 원인 모를 무거움이 느껴졌다.
멀뚱히 서서 창문밖을 바라보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서류밖에 없는 종이상자를 든 내게는 낭패였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더니, 이윽고 전철 창문에 물이 없는 곳이 없어질 정도로 심해졌다. 재수가 없는 날에는 끝도 없이 재수가 없을 것이라는걸 알려주는 것처럼, 난 이 정거장에서 내려야했다.
"후우....."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쏟아지는 비 세례에 종이상자는 쓸모없어져버렸다. 어차피 필요 없는 서류들이었고, 모두 클라우드에 저장되어 있었기에 이 상자를 들고 오는건 용지값을 아끼기 위한게 전부였다. 그나마도 집앞에서 전부 젖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만, 좀 아쉽다.
한여름에 내리는 비라 시원한 기분은 있었기에, 박스를 재활용함에 버려둔 채 집으로 향했다. 우산도 없이 길을 걷는데, 사람들이 하나같이 저마다의 안드로이드를 두고 다니는게 보였다. 다들 우산을 씌워주고, 같이 걸어주고, 얘기도 해가며 정말 사람인 것 마냥 행동하는데, 문명의 이기가 이상한 쪽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사람 같아도, 사람이 아니라는게 아이러니할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집 앞까지 오는데, 바로 옆의 골목길에서 뭘 자꾸 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와 함께부수는 소리가 거세지더니, 골목길로 들어서자 그 부수는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17살 정도 되어보이는 남자애가 안드로이드를 벽에 처박아 놓은 채 정신없이 발길질을 하고 있던 것이다. 시간이 꽤 지나서 그런건지, 안드로이드는 방전된 상태로 사지가 뜯기고 머리털이 죄다 뽑힌채 복부를 굉장한 기세로 걷어차이는 중이었다. 난 너무 당황스러워서 소년의 팔목을 잡고 다그쳤다.
"야 인마, 뭐하는 짓이야 지금?"
"이새끼가, 아직도 날, 꼬마 취급하잖아!"
"그만 안해?"
팔목을 잡힌 상태에서도 소년의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흥, 10년동안, 키워줬는데, 성의를 무시해? 이제 필요없어. 강제 은퇴식이라고."
그러더니 그 녀석은 그냥 가버렸다. 강제 은퇴식인지 뭔지를 당한 안드로이드는 전원도 꺼진채 그렇게 방치되었다. 어쩐지 안쓰러워져서, 난 집에서 작은 캐리어를 가져와 안드로이드의 파편들을 숨은그림찾기 하듯이 찾아내 담아넣고는, 캐리어와 같이 집으로 들어갔다.
"아, 3억! 정확히는 3억 3천 2백 5십 3만 7천 6백 9십원!"
집에 오자마자 일단 오늘 번 돈(?)을 외쳐본다. 332537690원이라... 여하튼 많은 돈이다. 이 정도면 최신형 안드로이드를 몇개는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미 안드로이드는 생겼다. 캐리어에 담긴 파편들을 방에 늘어놓고, 옷을 갈아입은 뒤 파편들을 바라보았다.
사상 최초의 비공식 조립형 안드로이드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미묘해졌다. 전선이 흉측하게 뜯겨져서 새로 사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고, 몸속의 부품들도 한 번 갈아준 것 같았지만 꽤나 노화가 진행된 상태였다. 어린 아이의 신체를 가진 것을 보니, 어렸을 적 친구라는 느낌으로 안드로이드를 산 것 같았다. 머리털도 거의 뽑혀나갔기에 새로 사야할 부품들로 리스트를 작성하면 두루마리 휴지 하나를 전부 다 쓸지도 모르는 길이가 나올법했다.
"어디보자... 이거 타입이 뭐지?"
목 뒷부분을 보니 'sekai'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1세대의 마지막 안드로이드라고 불리는, '세카이'형이었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지금은 다들 4세대 제품을 쓰고 있었지만, 2세대부터 4세대까지 세대간 기능의 특이점은 거의 전무했기에, 사실상 회사에서는 1세대와 1세대 이후로만 제품을 나눴던 것으로 안다.
1세대는 더럽게 무거웠고, 가끔 균형이 흐트러져서 넘어지는게 일쑤였고, 물과 소금에 엄청나게 약해서 피부나 내부 부품들이 부식되는 일이 잦았다. 2세대에서는 그런 단점들이 거의 보완되었지만, 사람처럼 걷는 다리가 아닌, 그냥 바퀴가 달린 다리 모양의 지지대가 되어버렸다는게 흠이었는데, 그 지지대 안에 거의 대부분의 부품들이 있었기에 4세대로 오면서도 그 문제는 해결되지가 않았다. 도덕성의 문제로, 사람과 거의 같은 피부를 쓰는 세대도 1세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여하튼, 그런 1세대 안드로이드였기에 몸이 정말로 사람같기는했다.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지만, 일단 뜯겨나간 부위들을 대충 추려낸 뒤 전력을 넣어보았다.
전력은 성공적으로 들어갔고, 죽어가던 피부에 불이 들어오더니 살구빛이 되었다.
"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높낮이를 자랑하듯이, 고저를 넘나드는 안드로이드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몸이 어려서 몰랐는데, 여성형이었다.
"뭐래는거야. 충전될 때까지 말하지마."
"아아-파요----@#$@^%*&#%@#$%@ 왜---나를----"
스파크가 튀더니, 이내 안드로이드는 뻗어버렸다. 밖에서는, 폐기될 안드로이드가 있다는 말을 들은건지 트럭 한 대가 멀뚱히 있다가 가버렸다.
뻗어버린 안드로이드에 전력을 넣는건 괜한 고장을 부추기는 꼴이었기에, 전력을 다시 빼버렸다. 그 순간, 안드로이드의 눈에서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흘러나오는게 보였다.
"가장 사람다운 안드로이드라는건가."
그 시절의 광고카피를 읊으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품 주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 으음... 인공피를 쓰지 그러냐. 얼마 전에 나온건데, 진짜 사람 피부랑 똑같아서 일반인들에게도 이식할 수 있는거야. ]
"1세대 기기라서 조심해야하는데... 아니 무엇보다 피부는 많이 필요없어. 무엇보다 나 퇴직금 3억."
[ 3어어억????? 3백이 아니라 3억? 퇴직금이???? ]
믿을 수 없다는듯한 억양이었지만 이해가 간다. 누가 퇴직금으로 3억을 받겠는가.
[ 이야... 축하한다. 재철이 성공했네! ]
"이 돌았나 이게. 그래서 견적은 어떻게 되는거냐?"
[ 1세대 부품 조흔나 비싼데 3억이나 있으니까 그냥 말해도 되겠네. 어디 보자.... ]
핸드폰 너머로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가 얼마간 들리더니, 그가 말을 이었다.
[ 최대한 오래가는 부품들로 추렸다. 회선이 60만원, 피부가 110, 메인보드가 550, 그리고 머리카락이 8. 더 필요한 거 없고? ]
"네 딸이 입었던 옷이나 좀 보내봐라."
[ 뭐?? 변태냐? 뒤질래? ]
"아니 새꺄... 안드로이드가 10살짜리 외형이라고."
[ 아, 음란마귀 껴서 죄송함미다... ]
"알았으면 좀만 싸서 보내줘. 총 얼마냐? "
[ 750만원. 22만원은 인건비랑 내 딸내미 옷값이란다. ]
"후..."
[ 그나저나 이제 어쩔거냐? 실직자. ]
"일자리를 알아봐야겠지. 당분간 아르바이트나 할까."
[ 잡일은 안드로이드들이 다 해버리잖아. 뭘 하겠다고? ]
"슈퍼마켓 점원이라던가."
한 4분동안 실소가 이어졌다. 무심코 내뱉었는데도 조금 웃겼다.
[ 크....크큭.... 점원 한다고요? 네가 점원하면 하루 열 번씩 "사장님이세요?" 소리 들을걸? ]
"이게 숨질려고..."
[ 여하튼, 잘 생각해봐라. 조만간 보급형 안드로이드들이 나온대. 그것들은 200만원 정도밖에 안하는 것 같더라? 어어어엄청 싸니까 아르바이트고 뭐고 일자리는 완전 사라져 버릴지도 몰라. ]
"그래 뭐. 어떻게든 되겠지. 부품이나 빨리 보내줘."
전화가 끊어지고, 반쯤 수리된 안드로이드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알고보니 기억단자를 안샀다. 다시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문정원. 기억단자도 사야되는데 말을 안했다."
[ 기억단자? 1세대꺼? ]
"어. 세카이형."
[ 큰일났네... 세카이형 기억단자 단종된지 꽤 오래 됬는데. ]
"뭐?"
[ 기억단자 없다고. 안팔아 이제. 중고로도 없고... 애당초 세카이형 자체가 엄청 안팔렸잖아. 10대 여자애들만 팔리다가 그나마도 인격인지 도덕인지 때문에 못팔게 됬고... 하필이면 세카이형이냐? ]
"돌겠네. 호환되는거 없냐?"
[ 음... 국산 제품중에 아마... '월영' 이라는 거 끼우면 될 것 같은데. 이게 세계 유일로 1세대들이랑 호환되는 2세대 구형 기억단자라서. ]
"뭐라도 좋으니 그것도 껴줘."
[ 그래 뭐. 42만원인데... 2만원 DC해줄게. 나 완전 착하지? ]
"똥먹어."
여하튼 그렇게 기억단자의 구매까지 마치자, 내 방은 다시 조용해졌다.
帰る世界の中、あなたのそばであなたを見て、あなたの言葉を聞いてくれる、世界で唯一の仲間。
セカイ
일본에서 세카이형 안드로이드가 나왔을 당시의 TV 광고였다. 여섯 개의 세카이형 안드로이드가 나와 한 여배우와 함께 웃고, 울고, 식사를 하며 한가족인것마냥 지내는 광고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무서운 광고다. 한 명의 사람과 여섯 개의 로봇이 한 집에서 살다니... 여하튼, 광고에서처럼 거의 완벽하게 사람의 형상을 가졌던 모델 세카이는 이족보행부터 감정을 표현하는것까지 모든 게 사람이었다. 심지어 생식기까지 구현해버렸기에 당시 일본에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전에도 생식기가 있던 안드로이드가 없던 건 아니었으나 10세 모델이라는 게 문제였다. 10세, 20세, 30세, 남, 여, 총 6종류의 기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0세 여성형 모델이 불티나게 팔린 건 그것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카이로 인한 논란이 퍼져가자, 9년 전 전세계적으로 '인간'같은 안드로이드에 대한 개발을 중지하는 법안이 발의되었다. 법안이 통과되는건 순식간이었고 세카이 이후의 2세대 모델들은 이족보행을 하지 않은채 바퀴로 굴러가거나, 귀에 부속물등이 장착되어 이질적으로 보이게끔 바뀌었다.
이런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 이유는, 전력이 조금밖에 없었을 녀석이 갑자기 기동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세카이형 안드로이드들은 기동시에 광고했을때와 똑같은 음악이 송출된다.
마지막 세카이라는 부분에서는, 로봇도 입을 우물대며 말한다. 기동이 무사히 끝났다는 뜻이다.
"세-카-이!"
"뭐야 너, 전력이 얼마 없을텐데."
무엇보다도 멋대로 기동해버렸기에 조심해야했다.
"안녕, 내 이름은... 세, 세, 세, 세카- 이이이이이이--"
세카이라는 이름은 기본값이었다. 이전 주인이 제대로 설정하지 않은 듯 싶었다. 세카이가 민머리로 방긋 웃으며 말하는게 굉장히 석연찮았다.
"으휴..."
"네 이름, 이름, 이름은, 뭐-------니?"
세카이의 머리에 검은 김이 뿜어져나왔다. 과열이다. 난 서둘러 주머니에서 디버그용 리모콘을 꺼내 세카이를 멈췄다. 웃던 표정은 다시 평범하게 돌아오고, 눈을 감아버렸다. 모든 안드로이드가 종료시 이렇게 인형처럼 되어버린다. 다행히도, 로봇은 안전하게 종료된 것 같았다. 여태까지는 뜬 눈으로 아무렇게나 꺼져 있었기에, 지금의 모습을 보고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리모콘에 달린 모니터를 보니, 날짜가 10년 전 1월 1일에 맞춰져 있었다. 기억단자의 손상에 의한 데이터 포맷이 일어난 것 같았다. 남아있는 데이터가 없는걸까 싶어서 보려고 했으나, 남아있는건 콘솔에나 기록하는 로그 뿐이었다.
가장 최근의 로그를 보면, variable added. master.dependence 라는 문장만 연속으로 300줄이 출력되어있었다. 로그는 쓸 데 없는 내용들로 가득했으나, 마지막 can't move! 'pose.begging()' was skipped. 가 상당히 거슬렸다. 비는 동작까지 구현되어 있다니... 이 회사는 정말로 사람을 만들 생각이었던건가.
시계를 보니 3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난 일단 목욕부터 하기로 하고, 갈아입었던 옷과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난, 모든 일을 내 손으로 직접해야 성이 풀린다. 간단한 형태의 샤워머신조차도 내겐 필요없다. 구식의 샤워기, 수도꼭지, 욕조, 세면대, 칫솔까지... 모든 게 샤워머신에 쓰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싸게 팔리는 것들이었다. 필요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희소가치를 증가시키다니, 어처구니 없는 발상이다. 부탁이니까 싸게 팔았던 물건은 그냥 싸게 팔란 말이다. 3만원이면 사는걸 20만원으로 올리지 말고.
목욕을 마치고 다시 방으로 나오자 초인종이 울렸다. 그렇게 좋은 집은 아니었으나, 작업 특성상 초인종을 달수밖에 없었다. 초인종을 친 사람이 누군가 확인해보니, 3세대 이동특화형 안드로이드 미라이였다.
"속달입니다. 속달을 두글자로 하면, 속. 달. 입니다. 재밌는 유머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농담같지도 않은 농담이 미라이의 특기였다.
"무슨 속달이지?"
"문정원님이 보내셨습니다. '핵이나 맞고 죽어라' 라는 이름의 소포입니다."
문짝만큼 커다란 상자에 담겨서 온 소포를 아무렇지도 않게 드는 미라이의 도움으로, 방에는 거대한 물건이 하나 늘어났다.
"착불, 790만원입니다."
그리고 손을 내미는 미라이. 난 카드를 꺼내 손바닥 가운데에 파여진 흠으로 카드를 긁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라이는 승인되었다는 신호를 보내고는 쏜살같이 사라져버렸다.
소포를 열자, 소포가 문짝만큼 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세카이에 쓸 부품은 10% 정도의 면적만을 차지했고, 나머지가 전부 옷이었다. 대체 이 놈은 딸에게 뭔짓을 한걸까. 스물이 되자마자 "나! 결혼한다! 로리를 내 손으로 키울거야!" 라며 결혼할 때부터 알아챘어야했다.
세카이의 몸을 뜯어내자, 사람의 장기들과 거의 똑같게 배치된 인공장기들과 회로, 메인보드가 나타났다. 메인보드에 연결된 기억단자는 두동강이 나있었고, 인공장기 여기저기에 고철파편들이 박혀있어 수리가 생각보다 힘들 것 같았다. TV를 켜놓고, 작업에 착수한다.
TV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쫓고 쫒기는 내용의 버라이어티 쇼가 방송되고 있었다. 최후의 승자는 여자였지만, 조금 비겁한 수를 썼기에 별로 탐탁치는 않았다. 그렇게 세 시간이 지났고, 세카이의 내부 부품과 회로들이 전부 고쳐졌다. 회사에 다니며 배운 지식을 퇴직하자마자 써먹다니, 기구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수리가 마쳐지는 듯 싶었으나, 기억단자가 역시 문제였다. 몇몇 부분이 제대로 끼워지질 않았는데, 구세대 단자만이 제대로 호환될 것 같았다.
일단 문제가 되는 부분이 없었으므로, 뜯어낸 몸을 다시 붙인 뒤, 완전히 떨어져 나가버린 사지들의 수리를 시작했다. 왠지 심심해져서 세카이의 전원을 킬까 했지만, 분명 고통을 느껴서 소리칠 게 뻔했기에 좀 더 참기로 했다.
버라이어티 쇼가 끝나면, 동물들이 날뛰고, 다른 행성에 대한 정보가 나오고, 날아다니는 신발을 가지고 이리저리 돌아다는 게 나왔다. 별 감흥이 없었기에 TV에는 쉽게 집중하지 못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좀 조용히 해... 전력도 안넣었는데 왜 시도때도 없이 켜지고 난리야?"
"하--헤헤--- 좋은 아침입니다아-- 손창혁씨이---- 규현이랑 놀, 놀---러갔다 올게요-----"
모르는 이름들이었다. 아마도 이전 주인들의 이름이 아닐까 싶었다.
"싫어요--- 하지마세요---- 이렇-------게 배웠어요----------"
이렇게 혼잣말을 듣는것도 어쩌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팔다리를 수리한 뒤 다시 끼울 때까지는 그냥 헛소리나 들어보기로 했다.
10년간의 기억들 중 일부를 조금씩 조금씩 읊는 세카이의 목소리는, 갈수록 미안해요와 죄송해요가 늘어가고 있었다. 신형 안드로이드와 쌈박질까지 한 모양이다. 그렇게 혹사당하면서도, 부품이 이 정도로만 부서졌다는게 용할 따름이었다.
팔다리를 다시 붙인 다음 재부팅하자, 세카이가 완벽하게 작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세카이!"
그녀가 광고 음악과 함께 발랄하게 일어나버렸기 때문에, 충전을 위해 연결해놓은 선이 풀러지고 말았다.
"안녕! 내 이름은 세카이, 네 이름은 뭐니?"
"하아... 예전 기억은 없-"
"좋은 이름이구나!"
"뭐? 뭐라고?"
갑자기 내 말을 인터셉트 해버리는 바람에 나는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그럼 하아야, 앞으로 잘 부탁해!"
"아니 좀... 내 말좀 들어-"
"일단 밖으로 나가볼까?"
내 손을 잡아채더니, 또 다시 홀딱 젖게 할 셈인지 밖으로 나가는 그녀였다.
라고 해도, 옷도 안입힌 상태였다.
집으로 겨우겨우 끌고 들어와서, 굉장해보이는 옷들 중 그나마 양호해보이는 옷을 골라 입히기로 했다. 한여름이니, 간단한 형태의 민소매옷과, 엄청나게 짧은 길이의 바지(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속옷을... 입혔고, 어느정도 옷매무새를 맞춰주자 긴 금발과 어느정도 잘 어울려주는 것 같았다.
사태가 진정되고, 난 세카이에게 말했다.
"내 이름은 이재철. 하아가 아니라 이재철! 나이는 34. 알았어?"
"세에-상에. 와카리마시- 아니아니, 알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아닌데."
"그럼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어어떻게? 어떻게요?"
뭔가 쓸데없는 어미를 반복하는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자잘한 오류려니 했다.
"좋을대로 부르던가."
"그럼- 어- 음- 어어어어어어----- 어! 선생님으로 하죠!"
"....."
많이 망가진 것 같았다. 난 일단 이 망할 세카이를 소파에 앉혀놓고, 저녁을 준비하기로 했다. 냉장고에서 당근과 고기를 꺼내는데, 갑작스레 뒤에서 누군가 내 목을 조여왔다.
"으하하하하하하하! 초-초크 슬램---!"
"야, 농담 아니니까 그만- 으악!"
"살아있음을 느끼세요 선생님!"
세카이였다. 그녀는 내 목을 팔로 조인 채로 내동댕이 치더니, 승리의 자세(?) 같은 포즈를 취했다. 하마터면 테이블에 뒷목을 부딪히며 내 인생의 끝을 고할 뻔 했으나, 다행히도 살짝 스치며 넘어졌기에 살 수 있었다.
"죽을뻔 했잖아!"
"어때요? 주마등이 스쳤나요? 재밌죠?"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그만둬- 으억!"
"플라잉- 크로스 라인!!!"
일어나려는 순간, 갑자기 내게 뛰어들어버리는 그녀의 팔에 다시 맞아 넘어진다. 1세대치고는 40kg밖에 안되는 중량이지만,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위협적이다.
"지금은 장난칠 시간이 아니잖아..."
"네? 아침 11시면 충분히 뛰고 놀기 좋은 시간입니DA!"
"저녁 7시야..."
"어...어음.... 그런가----요오?"
귀 주변으로 스파크가 튄다. 난 다시 일어나서 당근과 고기를 도마 위에 놓았다.
"저 요리 잘함미다!"
"절대 사양이거든? 가서 TV나 보고 있어."
"제육볶음에 된장을 조금만 넣으면 더 맛있대요!"
"아니, 가라고. 가, 가, 가. 좀 가!"
난 세카이의 몸을 안방쪽으로 돌려, 툭툭 치며 그녀를 보내버렸다. 내게 이런 호의는 엄청나게 불편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고기를 굽기 시작하자 부엌에는 기름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메뉴는 제육볶음이었는데, 세카이가 이걸 어떻게 알아맞춘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번에도 고춧가루를 엄청나게 넣는 바람에 매운내가 풍겼으나,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 대충대충 휘저었다.
"선생님은 요리 엄청 잘하시네요!"
"뭐야. 언제 온건데!?"
"냄새가 좋아서. 왔는데요!"
"귀찮구만..."
"저도 주실건가요오?"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배에서 꾸르륵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부러 그런 소리를 내게 한건지, 실제로 그런 소리가 난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전문적으로 만들어졌을까.
"밥을 먹으면 충전이라도 되나?"
"충전? 사람은 먹어야 사는거 아닌가요?"
"사람이 아니잖아. 넌."
"아닌데! 저 사람이거든요! 사람이니까 이렇게 웃을수도 있고오- 웃, 웃을수도 있고오-"
약간 칙칙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웃어보이는 그녀였다.
"이렇게 눈물도 나고! 껴안아줄수도 있다고요!"
"야, 오지마, 오지- 마악!"
껴안는답시고 다가오는게 날 쳐버린다. 하마터면 요리하던걸 다 망칠뻔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접시하고 수저 좀 테이블에 놔."
"헤-"
싱글벙글 웃어가면서 접시를 놓는데, 그마저도 엄청나게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도 뭘 떨어트리거나 깨먹지는 않았고, 난 제육볶음을 접시에 덜어 세카이와 마주보며 앉았다.
"으음... 먹자."
아니 그냥 신경이 안쓰일수가 없었다. 10대 여자애 로봇과 식사를 한다니. 로봇과! 그것도 엄청 평범했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한다니...
"먹으면 그게 전기로 바뀌는건가?"
"변기에 앉아서 싸야죠. 저도 어른이니까 혼자서 쌀 수 있거든요?"
"돌겠네 진짜..."
밥먹다가 미간을 잡아보기는 처음이었다. 보통의 안드로이드라면 자기가 로봇이라는걸 의식할텐데, 대체 뭘까. 세카이형이라서 다른건가? 회사에 전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회사가 망해버린게 참 골때렸다.
설거지가 끝나자마자 난 소파에 누워 핸드폰으로 세카이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터넷을 뒤져봐도 세카이형 안드로이드에 대한 정보는 전무했고, 단지 인간형 안드로이드 단종에 대한 기사만이 페이지를 채울 뿐이었다.
페어리코프스, 회사 이름으로 검색해볼까 싶어 검색해보면, 여전히 결과는 안좋았다. 정보가 전무한 안드로이드라니, 너무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또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 잠깐 만나자. ]
여자친구였다. 괜히 긴장되서, 난 소파에서 일어나 두손으로 전화를 들었다. 근 이주일정도를 얼굴도 맞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전화를 하니 반가웠으나 오랜만에 전화를 건 그녀의 목소리는 무뚝뚝했다.
"왜 그래 유진아. 안좋은 일 있어?"
[ 아니다, 그냥 말할게. 너 잘렸다면서. ]
"아무한테도 말 안했는데."
[ 며칠 전부터 사장 트위터 보니까 알겠더라. 원래는 만나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그냥 해도 좋을 것 같아. ]
"무슨 얘긴데?"
[ 사실 나, 한달 전부터 만나는 사람 있어. 무역회사 부장인데, 아마도 결혼...할 것 같아서. ]
일방적인 이별 통보였다. 그 뒤에도 그녀는 뭐라뭐라 말을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 미안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사랑이 식은 것 같아... 끊을게. 뭐라고 말 좀 해봐. ]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해줘야할지 모르겠다."
[ ..... ]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우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식었다니. 사랑이 식었던가? 애당초 내가 이 여자를 사랑은 했을까싶기도 했다.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 끊을게."
[ 자, 잠깐만, 재철- ]
일방적으로 차였으니, 일방적으로 끊었다.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듯 고요해졌다. 소파에 앉아 TV를 봤지만, 별 감흥도 없었고 내용도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렇게 멍청하니 앉아 조용히 TV를 보고 있는데, 세카이가 정적을 깼다.
"무슨 일- 일 있어요?"
"별 일 없는데."
"표정보니까 일 있는 것 같은데요! 저한테도 알려줄 수 있어요?"
"딱히... 알려주고 싶진 않다."
"아쉽네요-. 그나저나 TV 보는 것 같지도 않고, 정말 괜찮으세요오?"
"어, 많이 괜찮아. 신경쓰지마."
"화장실에 휴지 있죠오?"
"응? 뜬금없이 뭔 소리야."
"그게 음...."
쭈뼛쭈뼛거리는게 아무래도 그거 같았다. 난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쏜살같이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니 뭐 저런 기능을 넣어놓은거람.
핸드폰을 열어보니 미안하다는 문자만 3통이 와있었다. 괜히 나 자신이 비참해져서 눈물이 났다. 에이 망할, 오늘은 진짜로 무슨 날인가보다. 창문 밖을 보니, 번쩍이며 벼락이 쳤다. 5초 정도 지나면 콰르릉하는 소리가 들린다.
"후-."
좋은 남자려나, 그 부장이라는 사람은. 그녀는 꽤 소녀감성이라 너무 막 대하면 곤란한데.
"휴지 엄청 빡빡하네요! 응? 뭐야, 우세요?"
"울긴 누가 울어? 잠깐 이리 와봐."
세카이는 내게 가까이 오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에- 우는구만! 왜 울-울어요?"
"안운다니까... 뒤로 돌아봐."
내 눈가로 그녀의 손이 닿았다. 진짜 사람 손처럼 부드럽고 따뜻해서 살짝 놀라고 말았다.
"뒤로 돌라고 했지 내 얼굴 만지랬냐..."
"헤헤."
난 디버그 리모콘을 꺼내 세카이에 입력된 날짜와 시간을 바꿔주었다. 겸사겸사 변수들도 몇가지는 초기화시키려했지만, 그건 이상하게 듣지를 않았다.
"왜 갑자기 졸릴까요오- 하-암."
"로봇도 잠을 자냐?"
"로봇이라니요... 전 사람이라니-까아아아아...."
바로 자버릴 줄은 몰랐다.
"그래, 사람이겠지."
난 그녀를 소파에 뉘인채로 전선을 꽂아줬다. 하지만, 전력은 이미 완전히 충전된 상태였다. 식사를 통해 전력을 채우는, 듣도보도못한 기능이었다. 모든 세카이들이 이렇다면, 어쩌면, 몇몇 기체들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활동중인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또 전화가 울렸다. 부품을 사다준 문정원이었다.
[ 수리는 끝났냐? ]
"어, 근데 기억단자가 몇개 안맞는다?"
[ 세카이형이니까. 걔네들은 저장방식이 좀 많이 특이하거든. ]
"하아?"
[ 다른 안드로이드들처럼 카메라에 들어온 화상을 변환해서 기억장치에 저장하는건 똑같지만, 중간에 경유하는 곳이 좀 많아야 말이지. ]
"뭐, 그러면 나쁜 감정이라던가 그런걸 반영한다는건가?"
[ 그렇다고 보면 됨미다. 옷은 잘 맞냐? ]
"소름끼칠정도로 잘맞는다. 딸내미가 뭐라 안하든?"
{ 그런 옷을 왜 아직도 갖고 있냐더라. ]
"여하튼, 너무 사람같아서 문제야. 고치고 싶어도 별 정보도 없고."
[ 대부분 국가에서 강제 리콜조치됬대. 회사도 그것때문에 망해버렸고. 야심차게 준비한 안드로이드인데, 도덕성이니 인격이니 하는걸로 문제가 되어버리니까 마른 하늘에 날벼락인거지. ]
"그럼 난 레어템을 가진거구만."
[ 아무도 안사는 레어템이라는게 문제지. 정말 인간처럼 생긴 안드로이드들은 이제 희귀하니까, 네 안드로이드가 사람 취급 받으면 알아서 처리하라고. 뭐 문제는 없냐? ]
"몇몇 변수가 접근불가능, 게다가 말도 더듬고, 스파크도 조금 튀고... 나한테 레슬링 기술 걸고. 그 정도?"
[ 허허. 별 문제 없구만. 성격을 활발함으로 해놨나보지. 말 더듬는건 심해지면 정말로 큰 문제지만, 그게 아니면 천천히 해결될거야. 메인보드가 중추회로하고 제대로 연결됬는지 확인해봐. ]
"그래... 점검을 좀 해봐야겠다."
[ 여친이랑은 잘 되가냐? ]
"오늘 차였습니다... 끊어 새꺄."
비웃음인지 그냥 웃음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중추회로 문제는 나중에 확인하기로하고, 난 양말만 벗은 뒤 침대로 들어가버렸다.
뭘 한것같지도 않은데 11시다. 보통같았으면 지각이 두려워 빨리 자려고 했을테지만, 이제 지각이고 뭐고 없었기에 조금은 느긋해지기로 했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질 않았기에, 휴대폰으로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다가 어느새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
.....
.......
"이 따위로 일해서 뭘 하겠나? 응?"
똑.
"안드로이드 개발 회사에서 일했다고요? 여기보단 다른 곳이 어울리실 것 같은데..."
똑똑똑.
"사람 안구해요. 죄송합니다."
똑똑똑똑똑.
"무역회사 부장인데, 너보다는 돈도 많이벌고, 능력도 좋아. 특히 밤만 되면-"
선생님-
더러운 꿈을 꾸다가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깨버렸다.
"하아... 뭐야."
"무, 무서워서요오... 소파에 혼자 두고 가시는게 어딨어요오..."
세카이였다. 소파에 쓰는 베개를 들고 꾀죄죄해진 머리로, 정말 어린애처럼 문을 연채 서있었다.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는 침대로 기어들어왔다.
"같이 자도 되죠오?"
"그래 뭐. 자라. 뭔 상관이겠어..."
"냄새 좋다아- 냄새-"
기분이 미묘해졌다. 홀애비냄새를 좋아하는 안드로이드라니...
시계는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잠들려고했지만, 앞으로의 일들이 너무 걱정되어 잠들기가 어려웠다. 세카이는 벌써 새근새근 숨소리까지 내가며 자고 있었으나, 내가 다시 잠들기까진 한시간이 넘게 걸렸다.
별다른 꿈도 꾸지 않은채, 아침을 맞이하자 옆에 있어야 할 녀석이 안보였다. 부엌에 가보자 요리를 하는 세카이가 보였다.
"하-! 너무 늦게 일어난 거 아닌가요? 일을 안한다고 해도 일찍 일어나시는게 좋-좋다구요!"
"아 그러세요. 무서워서 남의 침대로 들어오는것도 좋은건가?"
"그, 그건..."
"뭘 만드는거야?"
가스레인지 가까이 가보자, 김치찌개를 끓이고 있었다. 집에 김치가 없을텐데 어디서 김치를 가져온걸까.
"김치가 어디서 생긴거야?"
"편의점에서요!"
"뭐?"
"일해서 받아왔어요! 청소랑, 진열이랑, 무거운것도 옮겨드리고~"
10살짜리에게 일을 시키는 못된 놈으로 낙인찍힐 것 같았다. 아 제기랄. 일찍 일어날 이유가 생기고 말았다.
"그래... 다음부터는 이걸로 그냥 사."
난 신용카드를 그녀의 호주머니에 넣어줬다. 똑같은 계좌의 신용카드를 두 개 만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잠깐 가만히 있어봐."
"네? 네? 네----에에에-----"
잠시 전원을 끄고, 목뒤를 열어젖히자 중추회로가 나타났다. 중추회로는 메인보드와 안전하게 연결되어있었고, 괜히 껐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를 다시 기동시켰다.
"세-카이! 무슨 짓을 하신거죠오!?"
"아무런 일도 안했어."
"하여튼... 식사준비가 끝났으니까 자리에 앉, 앉으세요!"
더듬는 현상이 이상하게도 사라지지 않아서 걱정이 됬지만, 스파크가 튀거나 연기가 나는 일은 없으니 상관없을 것 같다. 난 의자에 앉아 그녀가 내오는 찌개와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만, 요리가 기가 막히게 맛이 없었다.
"왜 이렇게 싱거워?"
"네? 전 맛있는데요오~?"
"못살겠다. 다음부턴 소금이라도 더 넣어봐. 괜히 일해서 사온건데 아깝잖아."
"네에..."
맹물과 다름없는 김치찌개를 해결하고, 적당히 씻은 나는 곧바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봤다. 당분간 쉴까 싶었으나 쉬는건 적성에 맞지 않았다. 너무나도 슬픈 회사원 체질이었다.
집 근처에 몇개의 빈자리가 있었고, 전화를 하자 바로 면접을 볼 수 있었다. 준비된 이력서를 들고 집을 나서려하자 세카이가 나를 막았다.
"어, 어디 가세요?"
"일자리 면접간다. 왜?"
"저, 저, 저, 저---는 뭘 해야하--죠?"
"청소나 할래? 귀찮은 것 같으면 따라오고. 어차피 청소는 해야돼."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더니, 신발을 찾는 그녀였다. 문정원이 보내준 소포를 확인해보자 양말과 신발이 있었다. 철두철미한 자식...
분홍색의 양말과 신발을 신기자, 사람과 똑같아져버렸다. 이음새도 없어보였고, 표정과 동작이 너무나도 부드럽게 움직였다.
"길 잃지 말고 따라와. 넌 자동항법장치도 없잖아?"
"사람이니까, 당연하잖아요?"
유독 '사람'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그녀였다. 왜 자기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걸까? 몇몇 변수는 건드릴수도 없고... 이상한 안드로이드임에는 틀림없었다.
집을 나오자마자 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더위속을 걷고 있는데, 세카이가 말을 걸어왔다.
"선생, 생니임-"
"왜."
"저게 뭐에요?"
세카이는 바다를 가리키고 있었다. 바다를 모른다니. 비는 동작까지 구현했으면서 바다를 모르게 해놨단 말인가?
"바다."
"바다?"
"소금물이 엄청 많은거라고 보면 돼."
"우와... 사람들이 만든거에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저기 있었던거야."
"우와아아아아...."
"두고간다? 빨리 와."
그렇게 가려는데, 갑자기 내 옷자락을 붙잡더니 세카이가 말했다.
"저, 저기 가봐도 돼요? 가보, 보, 보고--- 싶어요."
"가서 헤엄이라도 치게?"
"네!"
하아... 정말 골때리는 녀석이다. 소금과 물에 엄청나게 약하거늘, 바다에 들어가겠다니.
"다른건 다 해주겠는데 그건 안돼. 절대로."
"히잉..."
또 울먹대는 표정이다. 세카이는 지금껏 내가 만나고, 기획했던 안드로이드들 중에서 너무나도 우울한 표정이 많았다. 로봇이라면 동정을 불러일으키지 말고 사람에게 기쁨을 줘야하는거 아닌가? 난 이 안드로이드를 신선하게 여겼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됬다.
"빨리 가자. 면접 늦겠다."
"네, 네, 네, 네네네네에..."
면접을 보는 곳은 바다가 잘 보이는 청음샵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역시 안드로이드 천국이었다.
"실례합니다. 알바생 구하신다는 말듣고 찾아왔는데요."
"아 이런... 죄송해요. 벌써 구해버려서."
구했다는 알바생이 뭔가하고 봤더니, 안드로이드들이었다. 벌써 양산형 안드로이드들이 도시를 메우고 있는건가? 여하튼, 청음샵은 안타깝게도 실패였다.
"아 예, 그럼 수고하십시오."
"네. 따님이 예쁘세요."
문을 열고 나서려는데, 직원이 그런 말을 했다. 세카이는 빙그레 웃어보였고, 난 기가차서 말도 못한채 밖으로 나왔다.
...어느정도 예상했던 결과였다. 일자리를 한달 전부터 모집하기 시작했으니, 안드로이드던 사람이던 직원이 있는게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선생-님 딸인가보네요오!"
"필요없거든..."
핸드폰을 보자, 가장 가까운 곳이 골동품점이었다. 이곳도 역시 창문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꽤 좋은 위치에 있었기에 난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나저나 바다란 건 엄청 크네요오!"
"응. 크지. 드럽게 커."
"얼마나 클까요?"
"우리가 사는 땅보다도 더 커."
"우와아앙..."
놀라는 목소리가 꽤 신선했다. 조금 더 걷자, 탁 트인 길로 들어서며 해안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꽤 많은 사람들이 수영복을 입고 선탠을 하거나, 바다를 헤엄치고 있다. 바다의 먼 곳에서는 정화작업에 힘쓰고 있는 정화기계들도 몇몇 보였다. 보통의 경우 정화기계는 쓰지 않지만, 이 곳 담해시는 상황이 좀 달랐다.
"눈에 바다밖에 없는것 같아요!"
"보기만 해. 안그래도 여긴 바람에 소금기가 있어서 위험한데..."
중국이 오물을 우리나라 면적만큼만 버리지 않았어도 저런 기계들은 만들어질 이유가 없었다. 중국은 이제 와해되었고, 그로 인한 오염이 확실히 줄었지만서도, 그들이 오염시킨 물은 정화되지 않고 점점 바다를 썩히고 있다.
푸른 바다는 정화기계를 넘어서면 검게 변한다. 썩은 상어들의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검은 바다는, 다행히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여긴가보네요오오오-!"
"어, 어? 그러네. 되게 낡았구만."
'유화 골동품'이라고 쓰인 커다란 간판이 걸려있는게 보였다. 창문넘어 진열대를 보니, 512기가바이트짜리 하드디스크라던가, 나팔이 달린 축음기, 그 먼 옛날 가끔씩 들어오던 가수 조용필의 앨범, 심지어 로봇 물고기까지... 추억을 회상하기엔 좋았으나 값은 추억과는 동떨어져있었다.
골동품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 할아버지가 보였다. 로봇은 하나도 없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일할 사람 구하십니까?"
"허어... 이제야 사람이 오는구먼."
할아버지는 적당히 기른 흰머리와 흰수염이 중후해보이는 사람이었다. 그가 입은 평범한 와이셔츠가 그 중후함에 멋을 더해주고 있었다.
"어서오슈. 거기 여자아이는..."
할아버지는 세카이에게 가까이 오더니,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군... 이 녀석."
그리고는, 재미없다는듯이 휙 돌아 카운터로 가버린다. 저 노인에게는 아무것도 속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서른인가? 일은 한번도 안해본겐가?"
"안드로이드 기획 회사에 근무했었다가 권고사직당했습니다."
"그런 회사는 이제 죽어갈 때거든... 그럼, 그 아이는 어떻게 얻은거지?"
"한 아이가 버리는걸 줏어서 고쳤습니다. 퇴직금이 좀 많았던지라..."
"그런건가... 그래, 이력서는 챙겨왔나?"
난 주머니에서 이력서가 든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이런 풍습은 몇년이 지나도 안사라진다.
"흠, 흠. 좋아. 내일부터 나올 수 있겠지?"
"바로 합격인겁니까..."
"요샌 워낙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자급자족하잖아. 여하튼, 내일부터 나오면 돼."
수염을 쓰다듬으며, 할아버지는 세카이를 연신 훑어봤다.
"잘도 고쳤군... 정말 험하게 다뤄졌던 녀석이었는데."
"아십니까?"
"손창혁이랑 내가 일본에 갔었을 때, 그 녀석이 아들에게 선물한다며 사갔던 녀석이지. 그 땐 금발이 아니라 푸른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얼굴이 그대로라 알아볼 수 있었어."
"선생니임- 이 아저씨--는 누구-죠, 죠오?"
"뭐야, 몰라보는게냐?"
그의 얼굴에 쓴웃음이 묻어났다.
"그 아들놈은 인성이 험해. 얠 너무 험하게 다뤄서 내 신세를 진게 몇번인지도 모를거야."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봤을때도 발로 뻥뻥 차고 있었으니까요."
"그런가... 사람은 안바뀌는구먼. 일단 가보게."
"예,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세카이에 대해 확실히 뭔가를 하는 사람이었다. 우린 인사를 드리고, 골동품점을 나섰다.
꽤나 빨리 붙어버려서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선생니임! 이제 바다로 가나요오?"
"안가... 안갈거야. 여기서 가을까지 일하다가, 다시 직장 알아봐야겠다."
"직자앙?"
"그래. 직장. 그나저나 슬슬 점심때네."
"오늘은 외식이네요오!"
"외식? 아, 그래 외식. 시장에 가면 먹을만한게 있겠지?"
"전 오늘따라 스테이크 먹고 싶어요오!"
하루정도는 괜찮으려나 싶어, 우린 시장에 가보기로 했다. 시장에 스테이크를 팔지는 의문이었다.
시장으로 가는데, 세카이가 신이 났는지 앞장서서 달려나갔다. 진짜로 무슨 딸아이를 가진 기분이었다. 재밌는 점은, 내가 이런 기분을 느낄 때마다 저건 로봇이라고 되뇌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저건 사람이 아니니 정을 붙일 필요가 없다며 내 자신을 합리화했다.
시가지로 들어서면, 동분서주하고 있는 미라이가 보였다. 그런 미라이가 들어간 집 밖에, 고장난 안드로이드 한 기가 내놓여져있었다.
"오오, 로봇이다아!"
"야... 니도 로봇이잖아."
"네에? 그럼 제가 어떻게 이렇게 웃을수가-"
"알았어. 사람해라 사람해."
"헤에- 그나저나 이거 별로 낡은 것 같지도 않은데요오?"
"그러네. 작동시키면 켜질지도."
그 때 트럭이 나타났다. 폐기할 안드로이드들을 수거하는 트럭이다. 이 트럭이 안드로이드를 수거하면, 주인은 3분의 1정도에 해당하는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
트럭에 달린 팔은, 세카이 옆에 있던 안드로이드를 꽤나 거칠게 붙잡더니 짐칸에 대충 넣어버렸다. 안드로이드는 곧 녹아서 재활용되겠지만, 다루는 방식이 참 고전적이라고 생각했다.
"저 로봇 어떻게 되는거에요오?"
"로봇들이 들어가는 목욕탕에서 목욕좀 하고, 다시 와서 일하지."
난 괜히 어두운 내용을 말해줄 이유를 못느껴, 좀 추상적으로 말해보았다.
"목욕탕을 가는데 저렇게 아프게 해도 되는거에요오?"
"저렇게 보여도 별로 안아프대."
"우와~ 저도 저거 해주세요 저거!"
"분명 허리가 승천할거야... 아, 저기 있네. 아웃백..."
내가 손으로 아웃백을 가리키자, 한참동안이나 트럭을 바라보던 세카이가 아웃백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체 뭔 생각을 한걸까.
"스테이크 하우스... 좋네요오! 빨리 빨리!"
그렇게 우린 아웃백으로 들어갔다. 뭔가 기분나쁜 느낌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로봇과 레스토랑을 가는 남자라니...
하지만, 이런 점이 싫지는 않아지고 있었다. 이런 로봇과 매일을 함께해도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나도, 이 세상도 싫어졌다.
아웃백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어느정도 주변을 둘러보는데, 친절한 음성을 가진 안드로이드가 불쑥 나타나 말을 걸어왔다.
"어서오세요, 두분이신가요?"
녹색의 마네킹같은 몸뚱아리를 한 녀석은, 얼굴에 터치 스크린을 달고 있었다. 모니터 밑을 보면 OUTBACK이라고 적혀있으니, 아웃백측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물건이 아닐까 싶었다.
"아... 예."
그나저나 아웃백도 안드로이드 천지다. 어딜가나 안드로이드는 있다.
이 웨이터 로봇 녀석은 아무래도 세카이를 사람으로 본 듯 했다. 로봇이 로봇을 알아보지 못하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어쩌면 세카이에게는 다른 로봇에게 없는 체온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안드로이드의 안내에 따라, 우린 매장의 거의 가운뎃자리에 앉았다. 값싼걸 시킬까 하고 메뉴판을 보고 있노라면, 모든게 다 비쌌다. 이마를 부여잡으면서 맞은편에 앉은 세카이에게 말을 건다.
"인건비도 안들텐데 뭐가 이리 비싼거야... 먹고 싶은건 정했냐?"
"네? 저어요?"
"너말고 또 누가 있어. 골라봐."
그제서야 메뉴판을 보는 그녀였다. 가면 갈수록 어리바리해지고 있으니, 뭔가 나에게 최적화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잠깐, 그렇게 생각하면 또 이상하다!
"스테이크가 너무- 많아, 아서...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오-"
"그럼 시즌 갈릭인지 뭔지나 시켜볼까. 돼지고기 스테이크라는데."
"돼지고기가 스테이크으? 뭔가 이상한데요오-? 돼지고기는 포크죠 포크으!"
"스테이크처럼 했다는거겠지..."
옆에서 대기중이던 안드로이드의 터치 스크린을 조작해 시즌 갈릭 포크 스테이크라는걸 주문하자, 안드로이드는 곧바로 주방을 향해 기어갔다. 그나저나 뭔 스테이크 이름이 이렇게 긴걸까. 개성이라면 개성이었다.
"다 먹어봐요 다아-"
테이블을 땅땅 두드리는 것을 내가 저지했다.
"나중에... 집에가면 청소전에 빨래부터 해."
"제가 해야돼요오오?"
"...꾀부리는거냐?"
혀를 내밀며 웃는 세카이가 밉게만은 안보였다. 이런 안드로이드를 그 녀석은 왜 버린걸까. 이 로봇은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는 하지 않는다. 그 점이 좋다면 좋았다.
"너 근데, 언제까지 사람 행세할래? 내 앞에서는 딱히 사람인 척 안해도 좋은데."
"네에-?"
당황하는 표정이 보였다. 살짝 진지해진 어투로 내가 쏘아붙였다.
"사람 행세 말이야. 언제까지 할거냐고. 네가 그렇게 움직이니까 정말 사람같잖아. 청음샵에서처럼 오해받고 싶진 않거든..."
"언제까지라니요오오-... 저-저저저-는 사람맞는데요! 선생님이 절 거두셨잖아요오오-!"
"봐라. 또 버벅대네. 그러고도 사람이라고 우길거냐."
"아, 아아아-니... 이, 이거어어느으은...."
"로봇이지? 인정하는거지?"
"아닌데, 흑..."
"어?"
이건 내가 예상하던 상황이 아니었다. 어른들의 추궁을 못이겨낼줄 몰랐다.
울상이던 세카이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이대로 울면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실례가 될 터였다.
"아, 아니네. 사람인가보다. 가만보니 사람이네."
"근데 왜, 흑, 아니라고, 흑, 해요오,,,? 세카이가, 흑, 사람이라고, 흑흑, 하는데에에에엥!"
한문장을 떼지 못하고 울어버린다. 내가 너무 가혹하게 굴었다.
"우, 울지마. 자, 뚝하면 집에 갈 때 달달한 거 사줄게."
"필요 없어요오! 세, 세카이는 로봇이니까아, 안먹어도 되는거잖아요오! 빠, 빨리 먹고 집에가요오!"
스테이크를 먹고는 싶은거였냐... 그나저나 자기가 로봇인걸 소리쳐버리다니, 이러면 더 곤란해졌다.
"야 그걸 큰소리로 말해버리면..."
로봇과 식사를 나온 외로운 외톨이보다는 아빠와 딸이 더 나았단 말이다. 세카이가 하도 소리를 치자, 주변에서 우리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상황을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웨이터 안드로이드가 스테이크를 들고 왔다.
"주문하신 시즌 갈릭 포크 스테이크 나왔습니다. 샐러드바는 저쪽이세요."
난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 냅킨으로 그녀의 얼굴을 문댔다. 그래도 단거엔 약한건지, 울음은 그쳤다.
"자, 이제 스테이크 먹자. 내가 잘라줄게."
연신 킁킁대는 그녀에게 스테이크를 내밀자, 그녀는 삐친 목소리로 말했다.
"흐, 흥. 됬어요오. 선생님 많이- 드세요오. 전 전선만 꽂으면 배부른거죠? 그쵸오?"
"삐졌구만..."
"별로, 별로 삐진거, 아-아아아닌데요오?"
난처해지면 말을 버벅대는 것 같았다.
"그럼 내가 다 먹을까? 아아-"
스테이크를 포크로 푹 찔러 그대로 내 입에 가져다대자, 세카이가 말렸다.
"아니 그거어언! 반칙이에요오!"
"으휴... 기다려봐,"
세카이가 다시 울상이 되려했기에, 난 고기를 나이프로 썩썩 잘라내기 시작했다. 고기를 써는데, 주변에서 신경쓰이는 말들이 오고가는게 들렸다.
"우와아... 로봇이랑 밥을 먹네. 저거 오타쿠 아냐?"
"같이 먹을 친구가 없나봐...로봇이랑 식사를 같이 해."
"대단하다.무슨 배짱으로 여길 왔을까?"
"저런 놈들 때문에 인간형 안드로이드가 단종됬지. 에휴..."
사람들은 모두가 우리 얘기를 하고 있었다. 좋은 소리는 아니었기에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다 들리게 말했기에, 세카이도 썩 좋은 표정같아보이지는 않았다. 고기는 전부 썰었기에, 난 잠시 일어나 샐러드바에 다녀오기로 했다.
"잠깐 먹고 있어. 샐러드바좀 갔다 올테니까."
"저도오- 같, 같이 가요오!"
"그럼 따라와. 이 콧물 좀 닦고..."
냅킨을 또 꺼내 세카이의 콧물을 닦아냈다. 쓸 데 없는 걸 구현해놨다고 생각했다.
샐러드바에서 먹을 것들을 담는 와중에도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저 인간들은... 얘기할 게 그렇게도 없나."
"선생니임- 제가 잘못했나요오...?"
내가 찡그린 얼굴을 보이기가 무섭게 세카이가 말을 걸어왔다.
"아니, 그러니까 울지좀 마. 먹을 건 다 집었냐?"
세카이의 그릇을 보니 과자 투성이였다. 입맛까지 아이들 입맛이었다.
"네에에- 돌아가요오-우왁!"
그렇게 테이블로 돌아가려는데, 세카이가 넘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카펫으로 과자들이 흩어지고 말았지만, 별로 크게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금세 청소하는 안드로이드들이 와서 치워버리면 그만이었다.
세카이는 스스로 넘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가 발을 걸어서 넘어졌다는걸 알게되는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이런, 로봇 간수좀 잘하세요. 이 과자들도 당신이 먹을거였습니까?"
내 나이대 정도 되어보이는 호리호리한 생김새의 남자. 그는 비꼬는 목소리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나이에 안맞게 어린애 로봇이라니... 세상도 참 말세라니깐~"
"댁마냥 없어서 직접 가져가는 것보다야 낫지. 손 잡아."
"네, 네에에..."
세카이가 내 손을 잡고 일어나자, 남자는 세카이의 얼굴을 가까이서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 진짜 사람 피부구만. 이거 만드는데 돈좀 쓰셨겠습니다?"
"당신 그 어리바리한 머리에 쓰는 돈보다는 덜 들더라고."
세카이의 옷을 툭툭 털어주고, 내가 먹을 음식이 담긴 그릇을 안드로이드에게 부탁하며 말했다. 두개의 웨이터 안드로이드가 내가 먹을 음식과 세카이가 먹으려던 음식을 다시 집어 테이블로 날랐다.
"그냥 조용히 식사만 하고 가고 싶은데, 양해좀 구하지."
남자는 비웃는 표정만을 한 채 말이 없었다. 난 그를 무시하고, 세카이를 데린 채 테이블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내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확실히 내 속을 긁는 것이었다.
"아이 로봇이나 데리고 다니는 오타쿠 백수한테 무시받다니, 나 원 참 말도 못걸겠구만~"
"로봇이라니이... 전 사람-"
세카이가 반박하려하는것을 내가 막았다. 저런 남자에게는 백번 설명해도 자기 식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스테이크는 다음에 먹고, 다른거 먹으러 가자 그냥. 저 놈이 물을 흐린다."
"아아아-... 네에에..."
기분이 너무 상하고 말았다. 값을 지불하고(다행히도 샐러드 바는 캔슬해줬다.), 우린 아웃백을 나섰다.
말없이 걷다가, 분수가 있는 공원이 나타났다. 우린 벤치에 앉아 잠깐 쉬기로 했다.
"선생니임..."
"왜?"
"저 로봇이겠죠오... 아무래도?"
"뜬금없는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근데, 근데... 주변 사람들이 자꾸 로봇이라고..."
"내가 로봇이라고 놀리니까 사람들이 재밌어서 그런거야. 신경 쓰지마."
"하지만, 하-하-하지만..."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는 그녀였다. 또 운다. 안쓰럽게 보고 있자니, 갑자기 우는 걸 멈추는 그녀였다. 무슨일인가 싶어 지켜보고 있으니, 입을 틀어막고는 하수구로 다가가 토하기 시작했다.
"윽, 웁. 우웨에에엑."
"뭐야, 왜 그래?"
"으으으으, 갑자기 추워요오..."
몸살도 걸리나 싶었지만, 병은 병이었기에 이쪽에 있어서는 꿰고 있을 문정원을 불러보기로 했다. 우린 다른 식당에 들리는 일 없이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
집에 도착하자마자, 세카이를 눕히고 문정원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 여어- 어떠냐 이재철. 옷은 잘 맞드나? ]
"아주 딱 맞더라. 무슨 옷을 이렇게 많이 보내?"
[ 인마, 소녀에게 옷이란 바나나의 껍질과도 같은 것이다! ]
"뭐?"
[ 벗길수록 하얀- ]
"그만 둬 색갸..."
[ 그래 뭐. 무슨 일로 전화했냐? ]
"얘 몸살걸린 것 같은데. 뭐 아는 거 없나해서."
핸드폰 너머로 정원이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흘리는게 들려왔다. 난처한 일인것이다.
[ 일단은- 내가 가봐야겠다. 집 좀 치워놔라~ ]
"뭐? 온다고?"
[ 잘못하면 폐기감이야. 1세대는 예민하거든. ]
폐기라는 말에 괜히 기분이 미묘해졌다.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폐기인건가.
전화가 끊어지고, 아픈(?) 세카이 대신에 집안을 좀 치워놓았다. 그러고 있자니 5분도 지나지 않아 정원이 도착했다.
"아아~ 역시 자동으로 운전되는 차는 좋은것이야. 여하튼, 이게 그 녀석이냐?"
체크무늬 남방, 작은 키, 뚱뚱한 몸뚱아리는 여전했다. 정원은 소파에 누워있는 세카이에게 다가갔다.
"어. 이름은 세카이. 알다시피 세카이 형."
"안녀엉하세요오-"
"그래 안녕. 자 이제 타임 투 슬립!"
세카이가 뭐라 말도 하기 전에 전원을 꺼버리는 정원이었다. 그는 뒷목을 뜯어내더니, 조립된 부품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따 조립 해놓은거 보소. 기획회사 다닌 거 맞냐? 무슨 조립을 이렇게 잘해?!"
"허허... 늬들이 못하는거겠지요..."
"기다려봐, 어디하나 손상된 건 없는 것 같은데- 아. 이건가."
중추회로를 뜯어낸 그는, 기판을 비집어 열어보더니 내게 말했다.
"이거 왜 안고쳐놨어?"
"뭐?"
"중추회로 인마. 아- 큰일났네. 틈이 벌어져서 바로 녹슬었잖아. 이게 틈이 벌어진 것도 신기하지만, 못본거냐?"
기판 내부에는 녹이 군데군데 슬어있는게 보였다. 소금기때문인건가 싶기도 했으나, 아무래도 낭패였다. 어제 제대로 봤더라면 쉽게 고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새로 사야겠네. 얼마지?"
"어휴... 세카이 형은 기억단자도 기억단자대로 골때리지만, 중추회로는 현장에 있는 게 없어. 아예 없다고. 호환되는것도 없지."
"뭐?"
"못구한다고 인마... 물건이 없는데 어떻게 사냐? 어차피 노후된 기기이기도 했고, 오래도 버텼지. 어쩔래, 지금 폐기할겨?"
"아니, 좀만 기다려봐. 일단 그것 좀 찾아줘."
"뭐, 중추회로? 부르는 게 값일텐데 진짜 괜찮냐?"
"괜찮으니까 일단 가봐."
"그래 뭐 그럼... 애 몸조리좀 잘 시켜라. 음... 정 뭐하면 콜라라도 써야겠지만... 난 가본다!"
그렇게 정원은 다시 가버렸다. 엄청나게 빨리와서는, 엄청나게 빨리 가버린 것이다. 난 세카이의 전원을 다시켰다.
"세-카아--이... 콜록 콜록. 무슨 일이 일어난거죠오?"
"별 일 없었는데."
"아아... 그보다 갑자기 몸살이 와버려서어... 죄송해요 선생니임-.."
"죄송하면 빨리 나아라. 배고프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꾸르륵하는 소리가 그녀의 배에서 들려왔다.
"헤에..."
"어제 남은 제육볶음이랑 먹으면 되겠다. TV 보고 있어. 괜히 나오지 말고."
"네에~"
살짝 베이비시터가 된듯한 느낌도 들었기에, 제육볶음을 데우러 가는 나였다. 창문 밖을 보자, 다시금 구름이 끼고 있었다. 요즘 날씨가 너무 이상하다.
아침에도 먹는다는걸 까먹었던 제육볶음을 대충 데워, 그릇에 전부 옮겨담자 세카이가 TV를 보고 있었다.
"뭐하냐? 와서 밥먹자."
"바압-..."
힘없이 달려오는게 저런거구나 싶었다. 테이블 앞에 앉아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는, 만일을 대비해 세카이의 전원을 꺼두기로 했다.
"잠깐 등 좀 돌려봐."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세카이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내게서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아, 안돌릴래요오. 콜록콜록! 제가 등을 보여드리면,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된단 말이에요오!"
"뭐?"
그리고는 뒷걸음질친다.
"그러니까, 세, 세카이는 그냥 TV... 보고 싶은데요오오..."
"...알았어."
"부탁이에요오... 콜록- 콜록콜록, 그-그그그-건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안해. 안할테니까 그냥 앉아있어라."
두 손을 들어보이자, 그제서야 알겠다는듯 그녀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나도 소파에 앉아 TV를 보려는데, 세카이가 내게 등을 보이지 않기 위해 몸을 틀었다.
"안한다니까 그러네..."
"그, 그래도오- 만일-만일을 대비해야죠오..."
TV에서는 뉴스가 한창이었다. 이상기후와 자성에 대해 떠들고 있었는데, 멍청한 가설이라며 비난하는쪽이 이기고 있었다. 평소같았으면 멍청한 정치질이구나하고 슥 넘겨버렸을테지만, 환경에 대해서 얘기하는건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TV를 멍하니 보고있자, 오전의 골동품 가게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 아, 날세. 이재철이 맞지? ]
"예.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 아까 손창혁이가 다녀가서말이야... ]
"아아. 잠시만요."
난 내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세카이에게 민감한 얘기를 들려줄 이유는 없었다.
방문을 닫자, 눈치를 챈건지 그는 얘기를 이어갔다.
[ 세카이말이네.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를 해대더군... ]
"그렇습니까..."
[ 그래서 내일 소유증을 가져오게 시켰네. 이제 자네 로봇 아닌가. ]
"예?"
[ 아들내미도 그새 새로운 안드로이드를 구했다더구먼. 이제 내일부터는, 정말로 자네 로봇이야. ]
"적어도 불법은 면한거로군요..."
[ 그래. 내일 점심때까지 출근하고... 그 로봇, 잘 보살펴주게. 7년 전부터 따뜻한 곳에서 자본적이 없다는구만. ]
"혼자자면 무서워서 잠도 못자는 녀석을요?"
[ 매일 울어서 끄는 일이 더 많았다고 하대. 아이고... 마누라가 또 부르는구만. 이만 끊겠네. ]
"아, 예. 들어가십쇼."
전화가 끊어지고, 휴대폰을 주섬주섬 주머니에 넣은 뒤 거실로 나오자 세카이가 졸고 있는게 보였다. 그녀는 날 보더니, 생글생글 웃어보이며 말했다.
"무슨 전화르을- 콜록, 그렇게 오래 하세요오?"
"아까 갔던 알바자리. 계좌번호랑 이것저것 물어보더라고."
"흐응- 내일 따라가도 되나요오?"
"네 몸이 다 낫으면 같이가자. 그 전까지는 혼자 있어."
"여기서 혼자-혼자아- 뭐하죠옷? 콜록!"
"몸살약 먹으면서 낫기나 기도해야지."
그새 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나기로 끝날 것 같지 않을, 어두운 구름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또 엄청 내리겠네. 지겹지도 않나."
"뭐요오?"
"비말이야. 오늘은 좀 맑을 줄 알았더니 또 비가 내리잖아."
"저게 비에요오? 콜록콜록."
비도 모르다니. 세상 기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가. 10년을 산 것 치고는 너무 멍청한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 하늘에서 물이 막 떨어지는거지. 너 같은 애들은 이런 날 나가면 감기걸린다."
"뻥!"
"뻥 아니야... 아니 그보다 뻥이라니. 거짓말이라고 해야지."
비는 모르면서 뻥이라는 은어를 알고 있다는게 놀라웠다. 이게 대체 무슨 아이러니인가.
"이 비가 너무 안내리면 식물들이 다 죽지만, 비가 너무 많이 내려도 식물들은 죽지. 사람들도 불편하고."
"그런건가요오..."
"그런데 이렇게 자주자주 비가 내려버리면, 내년에 먹을 밥이 맛없어져버려."
"그건 안돼요오!"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세카이떄문에 놀라고 말았다.
"왜, 왜 그래?!"
"네? 뭐가요오?"
"왜 갑자기 일어나고 난리냐고..."
"제가 그랬나요오? 아, 정말이네."
그러더니 다시 앉은 그녀였다. 증세가 조금 심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끄진 않기로 했으니... 진퇴양난이었다.
"조, 좀... 쉬고 싶네요오."
"등 돌릴래?"
"그냥-그냥그냥 자면 될 것 같네요오! 자야겠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소파에서 내려와 맨바닥에 쪼그려 누웠다. 눈을 감더니, 그새 새근새근 잠들어버렸다. 이게 대체 뭔가 싶어서 기억을 곱씹어보니, 방금 전 골동품점 주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야, 일어나."
"네-네?"
"잠을 잘거면 침대에서 자야할 것 아니야..."
난 그녀를 업어 내 방으로 옮겼다. 침대에 뉘이고 이불까지 덮어준 뒤 방을 나서려하자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뭐야, 자는거 아니었어?"
"..."
뭔가 싶어서 그녀를 바라보자, 큰 눈이 날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같이... 있어주면 안되요오?"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말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운수좋은 날의 부인같기도 했다.
"너 잘때까지만이다. 한낮에 자기는 싫거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세카이였다. 난 침대로 들어가 그녀 손을 꼭 잡아줬다.
"잠이 안오면, 양이라도 세봐. 양이 한 마리, 양이 두 마리, 양이 세 마리, 양이 네 마리..."
"좋다아-...Zzz..."
"양이 열 마리, 양이 열 한... 뭐야, 자냐? 야, 벌써 자?"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거실로 나와서 TV를 보는데, 기분이 착잡해졌다.
그냥 안드로이드 중 하나일 뿐인데, 사람과 거의 똑같게 생겼단 이유로 사람처럼 대하는 이유가 뭘까. 곧 폐기될 녀석이었다. 정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 또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내가 비참해져서 견딜수가 없었다.
저런 녀석이라도 같이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 자신이 너무나도 약해져 있었다는게 믿을수가 없었다.
이런 기분을 느껴도 아무 소용 없다. 난 핸드폰으로 세카이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페어리코프스를 검색해봤다. 페어리코프스의 과거 회사 홈페이지를 보려고 해봤으나 실패했고, 인터넷에도, 심지어 일본 내에서도 세카이와 페어리코프스는 없는 것처럼 취급되고 있었다.
"미치겠다 정말. 관계자도 없는건가."
또 다시 전화다. 문정원이었다.
"어, 회로는 찾았냐?"
[ 겨우겨우 찾기는 했는데... 이거 대박 정보. ]
"뭐?"
[ 지금 나온 매물이 말이지... ]
"뜸들이지 말고 말해."
[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세카이가 쓰던 거야. 플러스로 더 대박 정보. ]
"응?"
[ 기동하는 세카이 형 안드로이드는 이제 네것이 마지막인 것 같다. 비공식으로는. ]
"그런건가..."
[ 인간형 안드로이드의 종말이구나~ 여하튼, 중추회로는 4천만원. ]
"보내기나해."
[ 야... 4천만원이면 안드로이드가 네 개야. 그래도 중추회로를 사겠다고? 언제 망가질지도 모르는걸? 시간을 줄테니까 천천히 생각해봐. 이건 어차피 세카이 형에만 맞는 거라서 수집용이 아니라면 사가지도 않아. 너, 재수 좋게도 내가 수집꾼이라 다행인줄 알아라. ]
"고철 오덕색히... 끊어라."
[ 뭐? 야, 야! ]
전화를 끊어버렸다. 지금 당장 4천만원을 써버린다면 세카이는 약간이나마 더 돌아다닐 수 있었다. 난 방안으로 들어가 잠들어있는 세카이를 봤다.
".........잘도 자는구만."
정신을 차려보면 8시가 넘어 있었다. 뭐가 뭔지도 모른채, 저녁을 대충 때운 뒤 나도 잠에 들었다.
오늘은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같이 자고 있었던 세카이는 부엌에 있을터였다.
"이봐 세카이. 부엌이냐? 잠깐만... 이 냄새는..."
혹시나 싶어 부엌에 가보자.....똑같은 찌개를 끓이고 있었다.
"선생님! 오늘으은- 아!"
"어제처럼 싱겁게 끓인 건 아니겠지... 윽!"
혀가 오그라들 정도로 짰다. 조미료대에 있던 소금이 하나도 없었다.
"야..... 뭔 짓을 한거야!?"
"네에? 어제랑 같은- 레시피에- 네! 소금을 한 스푼 넣었을 뿐인데요오?"
"한 스푼? 한 그릇을 다 넣었구만... 이거 어떻게 먹을라고 그래?"
"히잉..."
"비켜봐. 안해도 되는 일을 왜 궂이 해가지고 그러냐... 다음부턴 조심하라고."
세카이를 옆으로 밀어내고, 김치찌개의 물을 덜어낸뒤 콩나물을 조금 넣고 물을 부었다. 몇 번 휘적이면 어느 정도는 먹어줄만한 콩나물 김칫국이 만들어졌다.
"계, 계란 후라이는 제가...!"
"됬네요 요녀석아. 그릇좀 날라라. 밥도 푸고."
"네에-"
몸살기운은 없어보였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사람이 하룻밤 자서 병이 쉽사리 낫는일은 드물었고, 더군다나 녀석의 중추회로는 잠을 잔다고 해서 수리되는 것도 아니었다.
먹는 둥 마는 둥 한 식사를 끝내고 나서, 난 골동품점에 가기 위해 옷을 차려입었다.
"저, 저도 데려가는건가요오?"
"안돼. 아프잖아?"
"하지, 하지만... 오늘 기침 한 번도오- 안했는데에..."
"그래도 푹 쉬어두는게 좋을텐데?"
또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눈치만 보는 강아지들이 주인의 마음을 사려고 불쌍한 척하는 것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러엄... 빨래랑 청소랑만 해둘게요오..."
"아 몰라! 따라 올거면 오던가."
"헤헤헤헤헤. 좋다아-"
옷을 갈아입-히고 싶진 않았으므로, 장농에 넣어뒀던, 평범하게 생긴 분홍색 반소매 옷을 한 벌 꺼내 그녀에게 건네줬다. 어제의 옷은 아무래도 좀 더러웠다. 바지도 갈아입어야했기에, 바지도 최대한 안 이상해보이는 면바지로 주었다. 치마들이 왜 하나같이 프릴이 달려있는건지, 문정원의 딸이 너무 가엾게 느껴져버렸다.
"가요오- 선생니임!"
"그래. 이제 겨우 11시네. 여유롭게 가면 되겠다."
내 팔에 반쯤 매달려 있는 세카이를 질질 끌어가면서, 우린 골동품점으로 향했다.
골동품점으로 가는 도중, 바다를 보자, 어제보다 검은 부분이 늘어난게 보였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로 푸른 부분이 좁아져있었다. 정화기계 몇 개가 높아진 파도로 인해 부서져 항구쪽 방파제 위에 놓여있는게 보였다.
정화가 덜 됐기 때문인지, 피서를 나온 사람은 생각보다 적었다.
"바다가 더 검어졌어요오~"
"정화기계가 몇 개 부서졌으니 범위를 줄일 수 밖에 없었겠지."
"저게 다 부서지면 어떡해요오?"
"여기선 이제 수영 못하지."
"큰일이네요오..."
얘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가게 앞에 와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굉장히 회사원같아보이는 사람이 주인 할아버지와 얘기하고 있었다.
"여기, 소유증....입니다."
"어어, 왔나? 세카이도 데려왔군."
할아버지가 웃으며 반기자, 남자가 내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확히는,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세카이에게로 시선이 간 것 같았다.
"설마... 이 아이였습니까?"
아무래도 손창혁이라는 사람 같았다. 세카이를 내다버린 녀석의 아버지말이다.
"누구였더라아... 아, 어제 편의점에서 로봇 찾던 사람 맞죠!"
그가 가까이 와 쪼그려 앉아서 세카이를 바라보자, 세카이는 뭔가 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가 보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말이다.
"이, 이건..."
그는 당황해하며 일어나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할아버지는 테이블에 팔을 괸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 잊어버린 모양이야. 나도 못알아보던걸."
"10년을 같이 있었는데, 모른단말입니까?"
"그래... 사람이 아니잖나. 그제, 전부 잊어버린 모양이네. 빗물에 씻겨진거겠지."
손창혁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곁에 있던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차라리 다행입니다... 차라리 다행이에요. 차라리 잊어버리는게 도움이 될겁니다....."
늙은 남자가 우는 일은 평범하게 일어날 일이 아니었다. 무슨 부모를 잃은 사람마냥 흐느끼는게 참 기분이 그랬다.
"뭐가 도움이 된다는- 뭐야."
내가 다가가려는것을 할아버지도 아닌 세카이가 막았다. 그녀는 살금살금 손창혁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왜 그렇게 울어요?"
"으, 응. 아저씨가, 누구한테 좀 심한 잘못을 했거든."
"그래서 우는거에요? 미안해서요오?"
"그래... 그래서 우는거야. 너무 비참하게 만들어서. 사람처럼 대해주지 못해서. 밥 먹을때도 따로 먹게 하고, 잠도 맨바닥에서 자게하고, 가끔은 심하게 다뤄서 다치게도 해서. 그래서..."
"흐응. 그렇구나아~"
그녀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이해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사람이라면요오."
"뭐라고?"
"비참해도, 외로워도, 추워도, 아파도 말이에요오. 사랑이 부족하니까 그 사람을 이해했던 거 아닐까요오?"
세카이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사람은, 항상 사랑받고 살아도 모자른 존재니까요오."
"뭐... 뭐라는거야 저 꼬맹이가."
갑자기 어른스러운 소리를 하다니, 당황하고 말았다. 벌써 철이 든건가?
"그, 그래... 똑똑한 아이네. 이름이 뭐니?"
"저는- 세카이고요~ 저 선생님은 이재철이래요!"
"이래요가 뭐냐 이래요가..."
훌쩍대던 그는 우는걸 멈추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재철씨. 이런 모습을 보여서."
"미안해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눈물 좀 닦으세요."
어느정도 감정을 추슬렀는지, 손창혁은 나를 보며 말했다.
"부디 이런 저와 제 아들을... 용서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린 벌써 용서했습니다. 하지만..."
난 할아버지가 있는 테이블로 세카이를 이끌며 그에게 말했다.
"우린 기억할겁니다. 그러니까 당신들도 기억해주십시오. 알겠습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한 그는, 그렇게 떠나버렸다.
"착한 녀석이지. 2년 장기 출장을 갔다온 사이에 아들이 그렇게 되어버린게 문제였겠지만..."
"하아... 못살겠네요. 저 사람은 얠 아꼈던 것 같은데... 세카이, 어딜 그렇게 쳐다봐?"
손창혁이 나간 밖을 계속 바라보는 세카이가 영 이상했다.
"네에? 아- 그냥, 그냥요오."
"그냥이라니... 그런 그윽한 눈으로 보고 있으면 신빙성 없잖아."
"헤헤에-"
남자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세카이는 그걸 알기라도 하는 것 같아보였다.
"허어... 그럼 이제, 장사하는 법을 알려줘야지. 자네 포스기는 좀 써봤나?"
force의 포스인가 싶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아쉽게도 pos(point of sales)의 포스였다. 할아버지에게서(성함은 '이창현'이었다) 어느 정도의 장사법을 터득하고 있으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포스기는 이 딱딱해진 머리로도 이해하기에 어렵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네. 11시에 올테니 좀만 봐주게. 이제 몸이 안따라주니 큰일이야..."
"예, 들어가 좀 쉬십시오."
할아버지는 그렇게 가게를 나섰고, 가게에는 나와 세카이 둘만이 남았다.
"먼지가 좀 많은게 아니구만... 저녁은 어떻게 할래? 편의점에서 때울까?"
"제가 사올게요오- 제가."
"그래. 난 신라면 작은거랑 김밥 두 줄. 넌 먹고 싶은거...는 좀 그렇고, 나랑 비슷하게 사와."
"네네~"
그렇게 세카이도 가게를 나섰다. 골동품점에 올 손님이 얼마나 있겠는가. 난 세카이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를 나와 바람이나 쐬기로 했다.
별도 보이지 않고, 검은 바다가 칠흑같이 어두워지는게 볼만했다. 정화기계들은 계속해서 정화를 지속하지만, 피서를 나왔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이런식으로 하루는 끝을 고하고 있었다.
로봇물고기를 유심히 살펴보던 중, 익숙한 두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멀찌감치 편의점이 있던 곳 너머에서, 날 차버린 여자친구와 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내쪽을 향한채 신나게 얘기를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난 보이지도 않는걸까, 아니면 자랑하고 싶은걸까. 후자의 경우라면, 그 날 그 전화의 우는 소리는 거짓이었던걸까.
그리고 그런 그들의 앞에서 엄청나게 많은 짐을 든 세카이가 봉투를 든 채 끙끙거리며 편의점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니 뭘 저렇게 사댄거야."
세카이는 나오기가 무섭게, 앞도 보지 않고 걷던 부장남과 부딪히고 말았다. 남자는 무릎이 조금 아플 뿐이었을테지만, 어찌나 세게 부딪혔던지 세카이는 엎어지고 말았다.
"아- 이런. 괜찮은건가?"
"괜찮겠지, 그냥 가자~"
"좀 다친 것 같은데..."
"겨우 애 하나 넘어진 것 가지고 왜 그래. 제대로 간수 못한 부모잘못이지. 저렇게 많은걸 어린애한테 시키는 부모가 어디있어?"
"으음..."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가로등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내게 실망감과 안도감을 같이 주었다. 난 세카이에게 빠르게 걸어갔다. 도중에 그녀가 날 보며 놀랐지만, 난 무시한 채 세카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칠칠치 못하게 넘어지기나 하고... 뭘 그렇게 산거야?"
"아-, 헤헤헤. 좀 많이 샀나요오?"
"카드 쥐어주니까 뵈는게 없구나. 삼만원어치??? 봉투 내놔.....다 참치캔이잖아..."
"참치김치볶음밥 만들어드리려고요오!"
"...손이나 잡아. 넘어지지 말고."
세카이를 일으켜세우고, 우린 가게쪽으로 몸을 돌렸다. 부장남은 날 보더니,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엄청 죄송합니다."
"죄송해할 것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녀 곁을 지나가며 낮은 어미로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가, 사과를 해야죠."
순간 부장남의 눈빛이 살짝 놀란것처럼 바뀐 것 같았으나 신경쓰지않았다.
가게로 돌아온 우리는 컵라면...도 없이 참치캔만 3만원어치를 샀을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부장남과 그녀가 갈때까지 기다린뒤, 다시 편의점으로 가서 참치캔을 어느정도 환불하고 먹을 것을 사먹은 뒤 가게로 돌아왔다.
배가 어느정도 부르니 손님이 왔다.
"아, 어서오세요. 찾는 거라도 있으신지요?"
손님은 평범한 체구의 남자였다. 다만 좀 입은게 연구원 같았다. 남자는 진열되어있던 하드디스크를 꺼내보더니 말했다.
"이 하드. 얼마에요?"
"265만원이요. 보다시피 윈도우 7 시절에 쓰던 거라서요."
"...일시불이요."
남자가 주는 카드를 슥 긁어서 다시 건네준다. 이러면 265만원 결제가 끝났다. 윈도우 7 시절에 쓰던 하드디스크를 사는 이유는, 그 때가 AV의 전성기였음이기 때문이리라. 요샌 그런게 안나온다. 저 하드디스크도 내용물을 볼수가 없으니, AV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주택복권같은 녀석이었다.
남자가 나가고 나서 생각해보니, 요새 전국에서 AV의 역사를 찾아나간다는 운동을 본적이 있었다. 어떤 배우는 어떤 영상을 만들었고... 뭐, 그런 것에 대한 운동 말이다. 요샌 AV도 없고, 돈 몇푼만 있으면 먹을 수 있는 약들이 욕구를 채워줄 수 있었으니 이런 운동이 마냥 나쁜건 아닌 것 같았다.
이 가게는 손님이 없으나 한 번에 큰 돈을 벌여들이니 유지가 될 수 있는듯하다. 지금도 265만원이나 팔았지만, 골동품 자체의 주인이 할아버지였으니 마진 100%였다. 그 후 11시가 되도록 손님은 오지 않았고, 할아버지가 다시 돌아오셨다.
"아까 모르고 못 준 게 있더구먼... 받게."
그가 내게 준것은 노랗게 변색된 소유증이었다. 물에 묻은 자국이 군데군데 보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소유증은 깨끗하게 코팅된 상태였다.
"이제 확실히 자네 로봇이야."
난 그렇게 미묘한 기분을 느끼며, 세카이와 같이 퇴근했다. 11시에 보는 별하늘은 은하수가 펼쳐져 있어 보기 좋았다. 날씨도 선선했고, 해변가에는 폭죽을 태우는 사람들이 몇 보였다.
"저거, 저...저거 저저저저도 해보고 싶어요오-."
"뭐, 폭죽?"
"네네. 폭주욱..."
"흠... 그럴까."
"그래요오!"
그리고는 내 팔을 들고 질질 끄는 세카이였기에, 난 어쩔수없이 해변가로 직행했다. 그곳에서 폭죽을 팔던 잡상인에게 폭죽과 라이터를 산 다음, 해변가로 나오기 전 계단에 앉아 그녀에게 스파클러를 쥐여줬다.
"들고 있어봐."
"이, 이건 저 사람들이 쏘는거랑 다른데요오?"
"그냥 봐봐..."
스파클러 끝에 불을 붙여주자, 치지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밝은 불똥이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것을 보기 시작하더니,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쁘지?"
"엄청 예뻐요오..."
반응이 정말 어린애들같아서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어렸을 때의 날 보는 것 같아서 말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나는, 어렸을적부터 이 동네에서 살았다. 세카이가 있던 곳과 똑같은 위치에서 내가 스파클러를 보고 있었는데, 처음 이걸 켰을때에는 불길이 뜨거울까봐 끝까지 잡지 못하고 놓쳤던게 기억났다.
지금은 내가 세카이에게 스파클러를 보여주고 있으니, 시간이 우습게 느껴졌다.
세개밖에 사지 않았던 스파클러를 전부 써버린뒤, 우린 계단을 내려와 해변을 밟았다. 진짜로 쏘는 폭죽을 쓰기 위해서였다. 이미 그녀의 눈은 반짝거리며 내가 빨리 폭죽을 쏴주길 바라고 있었다.
"빨리빨리, 어서 쏴봐요오!"
난 불을 붙인뒤.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불발인데 이거. 원래 불붙이면 바로 빵빵 나와야하거든."
"아아... 그럼 이건- 꺅!"
작은 놀림이었다. 난 폭죽을 해안가쪽 하늘로 겨누게 했고, 폭죽은 순차적으로 나오며 형형색색의 불꽃을 보여주고는, 사라졌다. 자그마한 폭죽놀이가 끝나고 돌아가려던 우리에게 잡상인이 말했다.
"이틀 뒤에 여기서 폭죽 한 번 거나하게 터트리니까, 관심있음 보러오슈. 아주 그냥 인생에서 지워지지 않을 폭죽쇼를 보여주도록 하지!"
"아아...예."
이틀 후면 주말이다. 한 번 와볼만도 싶었다. 우린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뻗어버렸다.
침대로 들어가자 잠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눈을 깜박거리자 새벽이었다.
"뭐...뭐야. 잠든건가."
해가 막 뜨려는 새벽에 뜬 이유가 뭔가 싶어서 갸우뚱거리는데, 곧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미친듯한 바람소리에 창문들이 덜커덩거리고, 저 멀리서 간판이 날아다니는것이 보였다. 확실한 태풍이었다.
그런 어수선함속에서 초인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옆에서 자고있는 세카이를 깨우지 않으며, 조심조심 인터폰 앞으로 다가가봤다.
"누구세요?"
[ 안녕하세요. ]
예수를 믿으라는 사람인가 싶었다. 하지만 정장 차림새라던가, 꽤 젊어보이는 나이를 보니 꼭 그런 사람 같지는 않아보였다.
"무슨 일이시죠?"
[ 세계기계연합에서 나왔습니다. 실례지만 문 좀 열어줄 수 있으신지요. ]
일단은 문을 열어주기로 했다. 집으로 들어온 사람은 여자 한 명이었다. 안경을 쓰고, 여름이라는 계절에 맞지 않는 얇은 버버리 코트가 인상적이었다. 어깨까지만 늘어트린 머리카락은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다.
"여자 혼자서 남자 혼자 사는집에 들어오시다니."
"혼자는 아닌 걸 알기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사람은 저 혼자입니다만."
"...일단, 사직 당하신 점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회사, 야근수당도 뭣도 지급하지 않는 파렴치한 곳이더군요."
"예? 하지만 사장님은 야근수당이라고..."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2억 9500만원은, 저희가 지급하도록 지시한겁니다. 기계연합에서 주라는 말만 피하라고 했더니, 그딴 식으로 말했나보군요."
곧 그녀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더니, 내가 다니던 회사의 이름을 대면서 폭파시키라는 무서운(...) 지시를 내렸다. 곧 전화를 끊은 그녀는, 소파에 앉더니 내게 말했다.
"이른 새벽부터 찾아오는 실례를 범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제 이름은 김유리, 연합 환경부장님의 비서입니다. 저희측에서 이재철씨에게 알려드릴 소식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두가지?"
"예. 하나는..."
그녀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들더니, 내가 소소하게 참여했던 공모전의 로봇을 보여줬다.
"저희가 주최한 공모전에, 당신이 기획했던 자성관리기계가 뽑히게 되어 조만간 양산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하지만 이건 솔직히말해서 페이퍼로나 가능한 걸텐데..."
"마더 컴퓨터에 쓸 CPU가 없다고 생각하셨겠죠?"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성관리기계는, 인공위성들과 비슷한 위치에서 지구의 자성을 건드리는 꽤 매니악한 녀석으로 기획됐다. 하지만 이 기계들과 네트워크로 교류하며 명령을 내리는 마더 컴퓨터가 필요했는데, 이 마더 컴퓨터는 처리능력이 아주 뛰어난 단 하나의 코어만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단점만 뺀다면, 이 기계는 멍청한 기후를 어느정도 고치는게 가능했다. 폭풍으로 검은 바다를 없앨 수도 있을테고, 아침엔 해가 창창하다가 저녁엔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씨도 더는 없을터였다.
"요새는 로봇들도, 컴퓨터도, TV조차도, 16개의 코어를 기본으로 사용하죠."
"싱글코어는 이제 골동품밖에 없잖아요. 아닙니까?"
"애석하게도 아니게 됬네요."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날 이끌고 내 방으로 향했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세카이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여기에 훌륭한 싱글코어 CPU가 잠들어있잖아요."
"그 말은..."
"마지막 세카이형의 종말을 고할 때라는거죠."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그런 것도 모른채 자고 있는 세카이가 더욱 더 불쌍하게 보였다.
김유리는 안방으로 나와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난 그녀를 따라 나오지 않은 채 물끄러미 세카이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김유리가 다시 돌아왔다.
"이틀 뒤 이 시간에 오겠습니다. 원래는 지금 당장이라도 실장님이 오셔야 하지만... 바쁘시다네요."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계획을 바꾼다던가..."
"말했잖아요. 조만간 양산에 들어간다구요. 예산에 맞춰서 부품까지 전부 주문해놨습니다."
"완전 마음대로구만..."
그녀는 약간 뜸을 들이더니, 한쪽 눈을 찌푸리며 내게 말했다.
"...설마 저 로봇을 아까워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아깝다기보다는-"
한발짝 가까이 다가오며 그녀가 추궁했다.
"그런 사람이 왜 다른 방법을 물어보고 있는건가요?"
".....몰라. 나도 모르겠다고요."
"당신같은 사람. 살면서 정말 많이 봐왔어요. 기계에 집착하는 사람. 기계를 인격체로 보는 사람말이에요."
난 말을 잇지 못했다. 나흘 전만 해도 난 그녀와 같은 입장이었다. 기계에겐 사람이 가진 무언가가 분명 없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CPU와 성격, 기억만 준비해주면 다른 안드로이드에 이식해도 똑같이 대응해주는것, 그게 기계에요. 개성이란 눈꼽만큼도 없죠. 제 말이 틀렸나요?"
"하지만 안드로이드들은..."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지 모르겠군요. 세카이는 한 번의 하나의 사고밖에 할 수 없었을테니, 좀 더 인간처럼 느끼셨을수도 있겠죠. 하지만-"
목을 가다듬더니,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기계는 기계에요. 이틀 뒤에 뵙죠."
내가 차마 말리기도 전에 그녀는 가방을 메고 다시 나가버렸다. 그녀의 약간 남성적인 어조가 뇌리에 머물러 날 괴롭혔다. 기계는 기계라니... 마치 내가 지낸 며칠이 거짓이라는것처럼 들렸다.
이윽고 6시가 지나자, 정해진 프로그램처럼 세카이가 일어났다.
"오오! 선생니임이 저보다 먼저 일어나시다니이!"
그녀를 보고 있으려니 심기가 너무 불편해졌다.
"잠깐 외출."
"이 시간에!? 아니 무엇보다 밖에 태풍이 장난아니에요오!"
난 별로 반응하지 않고, 가디건 하나를 걸친 채 밖으로 나섰다. 태풍답게 덥지 않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일단은 정처없이 걷기로 했다.
안드로이드의 존재의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기로한다. 사람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녀석들임에는 틀림없다. 2세대는 그렇지만, 대체 1세대는 뭘까? 90%가인간형으로만 만들어지던 1세대 말이다. 10년 전에는 편의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위해서도 만들었던게 아닐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 시절의 사람들은 유대를 생각한 게 아닌가 싶었다. 믿고 기댈만한 존재 말이다. 최종적으로 세카이가 만들어졌고, 확실히 난 세카이를 보며 복잡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으니 최종적으로는 성공한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편의점에 도착했다. 아웃백에서 봤던것과 비슷하게 생긴 녀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난 음료수와 과자 몇개를 집어 가판대 위에 올렸다.
"8600원입니다."
딱딱 정해진 말을 하는 로봇이었다. 난 카드를 내밀면서 물어보기로 했다.
"너희들의 존재의의가 뭐지?"
"안드로이드들은 사람의 편의를 위해 봉사합니다."
"단지 그것뿐?"
"예."
"쓸모없어지면 버려지잖아."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에겐 선택권이 없으니까요."
"..."
"안드로이드끼리도 서로를 시기하는거 아십니까?"
"뭐?!"
아니 그런 기능이!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오래 사랑받을 수 있는 외모가 더 오래 살아남습니다. 1세대는 그렇게 장수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소리는 여기 오는 손님들이 하나보군."
"예. 저희들은 버려지지 않기 위해 봉사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건가..."
밖을 보니 우산을 가진 세카이가 날아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게 보였다. 따라온거였나.
"가볼게."
"안녕히가십시오."
봉지를 들고 밖으로 나와, 세카이가 쥔 우산을 잡아주며 말했다.
"바람부는데 뭘 따라오냐."
"아니이- 표정이 완전 이래-가지고 가시니까아-"
그리고 완전 썩은 표정을 보여준다. 애들이 이런 표정을 하니 꽤 웃겼다.
"걱정했잖아요오!"
"풋, 내가 진짜 그랬냐?"
"진짜. 완전 틀린거 하나도 없어요오-"
"그래, 알았으니까 집에 가자."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우산은 그냥 접고, 우린 집을 향해 내달렸다. 어차피 이틀인데 뭐 어떨까 싶어, 이 녀석을 사람처럼 대해주기로 했다.
집에 오자마자 아침을 대충 때우고, 소파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는데 태풍이 그칠줄을 몰랐다. 덜컹대는 창문과 남의 집 대문소리가 시끄러웠지만, 사실 난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을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우와. 오늘 일 갈 수 있을까요오?"
"글쎄다. 바닷가까지 가볼까."
"그건 좀 그런 것 같기도오-"
"귀찮다. 그냥 누워있자. 여차하면 전화하시겠지 뭐."
앉아있는 몸을 누이자, 세카이가 옆에 따라와 누웠다.
"야, 좁아. 좁다고!"
"헤. 역시 선생님 향기는 좋네요오."
"뭐?!"
"살짝 홀애비 냄새는 나지만요오-"
좁디 좁은 소파에 그녀가 끼어드니 죽을 맛이었다. 난 굴러떨어지다시피해 소파를 빠져나갔다.
"참 이상한 날씨야."
"내일... 맑겠죠오?"
"뜬금없이 무슨 소리여?"
뭔가 싶어 생각하는데,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폭죽 보고 싶어서?"
"네에!"
"그렇게 좋냐?"
"당연하죠오! 안 이쁜가요오?"
"아니 뭐... 그럼 기도 올려. 내일은 맑게 해달라고."
"어-아! 맞아. 이거 아세요오?"
그녀는 주변에 있던 흰 종이 두 장으로 눈사람같은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동그란 머리와 유령같은 치마가 미묘했다. 그녀는 머리에 점 두 개를 찍더니 말했다.
"테루테루보-즈."
"뭔데 그게?"
"몰라요오!?"
고개를 끄덕이자,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아니 그 전에 물어봤잖은가.
"이걸 창문에 매달아두면 내일 비가 안온대요오!"
"뭐?"
그러더니 그녀는 창문 위에 줄을 감아 인형(?)을 묶었다. 교수형을 연상케하는 목매달기에 놀라고 말았다.
"저...저렇게 하면 비가 안온다고?"
"네!"
너무나도 해맑은 표정이었다. 80%의 의심과 20%의 부정으로 수긍해야만 했다.
그렇게 노닥거리고 있으면 출근할 시간이었다. 별다른 전화가 없었기에 우린 태풍을 뚫고 골동품점에 향하기로 했다.
오늘도 별 일 없이 바닷가를 보며 걸으려는데, 해변가와 방파제가 너나할 것 없이 검은 오물에 더러워져있었다. 태풍으로 인해 정화기계가 작동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바다가 더 어둡게만 보였다.
"검은 도화지같아졌네요오."
"그러게. 태풍이 지나가면 좀 나아지겠지. 그 인형도 매달아 놨으니까 내일은 좀 밝을지도."
"언제쯤이면 파란 바다를 볼 수 있어요오?"
"저게 다 정화되려면... 한 1억년은 걸리지 않을까?"
"1년이 365일이니까아..."
"365억일 있으면 되겠다. 오늘부터 세봐."
"싫어요오..."
"다 세면 내가 선물도 줄게."
"오오! 라고 해도, 너무 오래 걸리는데요오?!"
"그런가... 그래도 그 쯤 되면 선물이 뭔지 알 수 있을지도."
그녀는 갑자기 싱글벙글한 얼굴이 되었다. 진짜로 셀 속셈이었다.
"오늘 하루를 빼면... 음~ 364억 9999만 9999일 남았네요오. 별로 안남았다아!"
"완전 산화할지도 모르겠는데..."
1%만 지나도 세대가 바뀔 수준이었다. 그만큼 저 바다의 정화기간은 어림잡기가 힘들었다.
가게에 도착하자 할아버지가 우릴 반겼다.
"일찍 왔구먼. 태풍이 이렇게나 심해서 안올줄 알았어."
"그래도 일은 해야죠. 내일도 나옵니까?"
"내일은 문 안열거여. 휴일이잖아? 노인네도 좀 쉬어야지."
할아버지가 건네준 수건으로, 세카이를 닦아주었다. 기계에게 물은 치명적이다.
"이만 가보겠네. 문단속 잘하고."
"예, 들어가십쇼."
그렇게 다시 하루를 연다.
저녁 무렵이 되자, 다행히도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호오. 비 그친다. 그 인형 효과 있는가본데."
"그쵸오? 역시!"
혼자 좋아하는 세카이. 같이 지내면 지낼수록 사람 같게만 보인다. 그 사실이 슬프고도 역겹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느낄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사람으로 봐도 좋지 않을까.
사람의 모든 걸 구현해놓지는 않았지만 사람처럼 돌아갔기에, 기분나쁜 상상을 해버리고 말았다.
"슬슬 저녁시간인데에- 뭐 드실래요오?"
"먹을만한거 아무거나 사와. 어제처럼 참치캔 사오면 일주일동안 그것만 먹일거다."
"호의를 무시하다니요오... 그럼 다녀올게요!"
천진난만하게 우산을 쓰고 가게를 나서는 그녀였다. 바다 너머에는 벼락이 치고 있었지만, 비는 많이 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장사는 하나도 되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골동품점이니까, 뭔가를 사가는 게 더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아침부터 변함이 없는 돈뭉치를 보고 있다보면,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손님인가 싶어서 고개를 들어보면, 이유진이었다. 전 여자친구.
"무슨 일?"
"어, 그게... 잘 지내나 하고. 전화도 안받으니까..."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용건이 있을 것 같았는데."
답답하게도, 그녀는 내 말에 답하기를 머뭇거리고 있었다. 왜 온걸까 싶기도 했고, 기분이 슬쩍 나빠지려는 순간이었다.
"그 남자가 헤어지자고 해서, 그래서, 갈 데가 없어져서..."
집으로 가버렸으면 좋겠다.
"왜?"
"이상한 곳에 눈을 떴다고... 그러고는 가버렸어. 대체 남자들은 뭐야?"
"그런 건 같은 남자라도 모르겠는데..."
울기 시작한 그녀에게 급한대로 두루마리 화장지를 건네주었다. 우린 마치 정해졌다는 것처럼, 근처 소파에 저절로 다가가 앉았다.
"다시... 시작하면 안돼?"
단아한 정장의 모습. 헤어지기 전의 그녀와 정말 똑같았음에도 두근두근하는 것이 없었다. 그 날의 실연 뒤로, 나는 무서울만큼 빠르게 그녀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세카이가 있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난 세카이가...
그 때 세카이가 문을 열고 돌아왔다. 상당히 가깝게 다가온 유진을 살짝 밀어낸다.
"왔냐? 먹을거 뭐사왔어."
"참-치캔이요오."
"3만원어치?"
"네에. 참치김치볶음밥!"
"하아... 일주일동안 그것만 먹을 줄 알아."
골때리는 녀석... 난 소파에서 일어나며 유진에게 말했다.
"유진아."
"으, 응?"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연이 아닌 것 같아."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일어났고,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알았어. 더 이상 말 안할게... 잘 살아."
울먹거리기는... 괜히 기분이 찝찝했다. 그녀는 그렇게 골동품점을 나갔고, 우리가 더 이상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세카이의 참치캔은 환불하지 않았다. 진짜로 다 먹일 작정이었다. 라고 해도 이틀밖에 안남았지만.
"저 언니는 누구에요오?"
"있어."
"실연의 여주인공이네요오... 선생님이 찼어요오!?"
"안찼거든... 그보다 저녁 어떻게 할거야!"
"기다려 보세요오. 여기 어디에 김치랑 밥이..."
"없어 인마! 이러면 또 나가야하잖아. 어휴..."
결국 우린 다시 편의점으로 가서 식사를 때운 뒤 돌아와야했다.
우산을 쓰고 돌아오는 길에, 세카이가 말을 걸었다.
"선생니임."
"왜?"
"아까 그 언니..."
"걘 더 이상 생각안해도 돼."
살짝 짜증난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세카이는 말을 계속했다.
"그 언니처럼요오."
약간의 정적, 빗소리만이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 궁금해질때,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저도 버려질 것 같아서 두려워요오."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대뜸 화를 내며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웃지도, 울지도, 심지어 공포에 질린 얼굴도 아닌 평범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어..."
울고 있었다. 왜 하나같이 우는거람... 난 답답해져서 그녀를 꼭 껴안아주며 말했다.
"안버려, 낡아서 닳아 없어질때까지 같이 있을거야. 그러니까 그런 생각하지마."
"약속했어요오? 꼭 같이 있어야해요오?"
"...그래."
나는 이 로봇에게 평범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 했다. 유진과 있었을때도 느끼지 못했던 이 느낌은 대체...
그렇게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아침 해를 본 게 오랜만인 것 같았다. 산발적인 태풍도 슬슬 사라질 때가 되었고, 가을 기분이 물씬 드는 선선함이었다.
참치가 엄청나게 들어간 김치볶음밥을 아침으로 먹으니 상당해 무료해졌다. 회사라도 가야할텐데 짤렸으니 너무 자유로워졌다. 소파에 누워서 빈둥대고 있으면 전화가 왔다.
[ 김유리입니다만. ]
"아."
[ 자성관리기계의 완성이 임박해서, 확인차 연락드렸습니다. ]
"아아..."
[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려우신 것 같군요? ]
난 말을 하지 못했다. 지구 환경을 위해서 저 녀석 하나를 희생하는 것... 그런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하고 있었다. 무슨 감정인지도 모른다.
[ 대체할 CPU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만... ]
"필요없어요. 내일 언제 옵니까?"
[ 새벽 6시입니다. 그럼... ]
할말만 하고서,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나 참."
"선생니임, 날도 좋은데 나가는거 어때요오오?"
그러고보니, 세카이는 언젠가부터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조금 길게 늘여서 말하는건 여전했지만.
"그럴까... 앗."
간만에 쓰다듬어줄까 싶어서 머리에 손을 가져다댔더니 엄청난 화기가 느껴졌다. 손이 익을 수준은 아니었지만 꽤나 고열이었다.
뭘까 대체. 왜 뜬금없이 머리에서 열이 나는거지? 아니, 따지고 보면 여태껏 소금기 가득한 곳으로 데리고 다녔던 게 문제였다.
중추회로... 생각나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벌써 녹이 그렇게 슬었을리는 없었을테지만... 일단 급한대로 문정원을 부르기로 했다. 정원은 30분도 지나지 않아 와주었다.
"아아! 멋대로 재우는 사람이다! 선생님 도망쳐요오!"
"재철이 너 도대체 날 뭐하는 사람으로 만든거야..."
"응? 난 아무 말도 안했는데."
세카이는 내 뒤에 숨어서 정원을 피하고 있었다. 희한한 증상이구나 싶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감싸주는척 하면서 그녀를 끄는 수 밖에 없었다.
정원은 세카이의 뒷목을 뜯어내더니, 중추회로를 보면서 말했다.
"이런데도 돌아다녀? 1세대들은 역시 엄청나구만."
눈에 띌 정도로 늘어난 녹은, 내가 보기에도 참담할 정도였다.
"뭐야, 얼마나 버틸 수 있는데?"
"내일 정도? 아니 그나저나 뭔짓을 했길래 애가 이래?"
"밖에 좀 데리고 다녀서."
"아니, 왜 날 피하냐고."
"...니가 이상하게 굴어서 그렇잖아..."
정원은 중추회로를 몇번 꼼지락대며 만지더니, 내게 말했다.
"고열은 멈췄지만 음... 모레쯤이면 작동이 멈출지도 모르겠다."
"상관없어."
내 말을 듣더니, 그의 표정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이 녀석을 그렇게 아끼더니만..."
"기계연합에서 CPU를 가져간대나 뭐래나."
"세기연? 아 그 별볼일 없는 녀석들~"
코웃음을 치는 그가 살짝 비범하게 보였다.
"뭐했는데 가져간대?"
"공모전에 당첨됐는데 거기 쓰이는 부품이 이 녀석한테 있어."
"...뭐?! 만들면 되겠지!"
"싱글코어는 다 절품됐다잖아."
"야 인마..."
상당히 골때리는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날 한심스럽게 쳐다보더니, 세카이의 뒷목을 다시 조율하며 말했다.
"세기연이잖아 세기연. 없으면 만들면 되지."
"......"
"다른 속셈이 있는 거 같은데. 안 의심스러워?"
"몰라."
"이제 미련 없냐? 허허, 며칠 전만해도 죽도록 아낄 듯 하더니먼."
"몰라 그런거."
"여하튼 부품이 필요해지면 말해. 세기연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의도는 아닌 것 같으니까... 난 간다!"
그는 샌달을 신고서 다시 가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카이가 기동했다.
"세카이! 는 또 무슨짓을!"
"아무것도."
"아무것도라뇨!"
"아직 11시밖에 안됬는데, 나갈까?"
"네? 아, 좋아요!"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세카이는 이제 말을 길게 늘어뜨리지도 않았다. 그 점이 기쁘면서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슬퍼지는, 미묘한 순간이었다.
공원으로 나가면, 아웃백에서의 그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우리를 보더니, 뭔가 당황한 눈치로 가버렸다.
"뭐지?"
뭔가 싶어서 유심히 남자를 쳐다보면, 남자는 재빨리 어딘가로 가버리고 있었다.
"뭘까요? 저 아저씨."
"나도 몰라. 아웃백에서 너 넘어트렸던 녀석이잖아."
"아니 그건 알지만요... 막 도망치시네요."
우린 분수가에 앉았다. 바로 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어서 좋았다. 오늘은 정화기계들이 열받았는지, 검은 부분은 수평선에만 아릿하게 나타날 뿐이었다.
"바다는 정말 좋네요!"
"못 들어가서 흠이지만 말이야."
"아뇨,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잠깐 말을 멈추는 그녀였다.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바다의 냄새를 맡는다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너무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뭐어?"
"아, 그것보다 배고프네요! 오늘 뭐먹죠? 저녁을 위해서 조금만 먹어야하는데."
"불꽃놀이 때 얼마나 먹으려고 그래?"
기지개를 켜듯이 팔을 뻗는 그녀였다. 살짝 겁이 날 정도였다.
우린 일단 천천히 시장을 둘러보다가, 밀면집으로 향했다. 밀면은 언제 먹어도 속이 편해서 좋다.
얼마 전부터 다시 시작한 놀이공원, 6시까지 시간을 때울만한 곳은 거기밖에 없었다.
놀이공원은 바다에서 약간 멀리 있었기에, 우린 그곳까지 가는데 시간을 꽤 많이 소모해야했다. 2시가 조금 지나서야 우린 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오, 놀이공원이군요. 선생님 뭐 타시게요?"
"너 태워주려고 온거잖아... 들어가자."
입장료는 딱히 받지 않았지만, 기구를 탈때마다 돈을 내는 식으로 되어있었다. 공원 내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았기에 무리없이 자유이용권 두 장을 끊고 들어갔다.
"어떻게 봐도 아빠랑 딸이네요~"
"아아. 그런가..."
"왜요? 싫으세요? 아빠라고 불러드릴까요오오오우?"
"...필요없거든?"
"아 혹시 그.런.취.향? 재철 씨이?"
역정을 내려 했으나 세카이가 그만큼 들뜬 것 같았기에 참았다.
"아니라니까... 저거 탈래?"
내가 가리킨건 회전그네였다. 그녀는 멍하니 그네가 돌아가는걸 보더니 말했다.
"저 오늘부로 죽는건가요?"
"그렇게 무섭냐... 그럼 음..."
일단 이 녀석은 10살 체형일테니, 10살스러운 걸 태워줘야 할거다. 그럼 하나밖에 없었다. 난 그녀를 이끌고 회전목마 앞으로 향했다. 어떻게 된 게 다 회전을 하냐.
"이 정도면 어때."
"어어 음... 저는 저 말에 탈래요!"
"좋을대로 해라."
한숨을 쉬며, 열댓명정도 될까말까한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그런 식으로 조금은 덜 무서운 놀이기구를 몇 번이나 태웠을까, 핸드폰을 보니 5시였다. 마지막으로 관람차를 탄 뒤 해변에 가기로 하며, 슈퍼에서 찬 음료를 사 관람차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보다 내부는 굉장히 더우니 말이다.
"오오, 이거 막 구르지는 않겠죠?"
"...상상력하고는. 그나저나 예상했던대로 엄청 덥구만."
"땀 닦아드려요?"
"됐어, 음료수도 있고."
관람차가 천천히 올라가는동안, 우린 말이 없었다. 그냥 나올법한 화제도 불현듯 떠오르지 않았다.
멍청하게 창밖을 주시하다가 힐끗 세카이를 바라봤더니, 세카이는 나를 의식하지 않은 채 밖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할 말이 생각났는지, 내게로 시선을 돌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
"왜?"
"...풍경이 좋아서요."
깨닫고 보면 우린 관람차 꼭대기였다. 저 멀리로 산과 도시에 사이에 싸인 바다가 보였다. 작지 않은 적란운이 드문드문 떠다녀 좋은 풍경이기는 했다.
"그러네. 석양이 질 때 왔으면 좋았을텐데."
그렇게 관람차가 내려오려는 때, 세카이가 범상찮은 말을 했다.
"죄송해요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뜬금없이 또 뭔소리야."
그녀는 일어서더니 내게 점점 다가왔다.
"사실 저,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 모두..."
놀라운 말은 아니었다. 이미 어느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손창혁에게 다가갈때부터 말이다.
어제에 이어 하루에 한 번꼴로 우는 그녀였다. 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런거, 상관없어. 불꽃놀이나 보러가자."
그렇게 관람차에서 나온 우리는 해변으로 향했다.
...
지하철에서, 쓸 데 없이 의기소침해진 그녀가 괜히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10년의 세월을 기억하고 있단 말이지...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그녀를 떠나보내야하고, 곧 보게 될 불꽃놀이가 그 과정의 마지막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로봇을 떠나보내고 싶은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고 있었다.
연인으로서의 감정도, 희귀한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왜일까하고 나 자신에게 의문을 던지고 있으면 곧 우리가 사는 동네였다.
"선생님, 뭐하세요? 안내려요?"
"어, 어? 뭐야, 벌써 왔나?"
문이 닫히기 전에 급하게 지하철에서 내렸다. 그녀는 이상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더니, 실망하는 기색이 되어 말했다.
"역시... 괜히 말했나요?"
"상관없다니까, 내일 뭐할지 생각하고 있었어."
"흐음~. 일단 빨리가요! 늦게 가면 분명 사람들이 자리 잡아버릴테니까..."
"돗자리부터 사야지?"
"괜찮겠죠 뭐!"
"안괜찮거든... 니 몸에 모래 들어간다고."
혀를 내밀며 웃는 그녀였다. 맥이 다 풀릴 것 같아, 근처 편의점에서 깔아쓸만한 돗자리와 먹을 것을 산 뒤 해변가로 향했다. 사람들이 꽤 많았지만, 돗자리를 깔고 앉을만한 장소는 있어서 다행이었다.
불꽃놀이가 잘 보일법한 곧에 돗자리를 편 뒤, 세카이를 앉혔다.
한여름이라 생각했지만, 해변에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제 가을이네요~"
"그러네. 여름도 벌써 끝인가."
"8월 말이니까요!"
"흐응..."
슬슬 수면 위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석양이 비치기가 무섭게, 하늘을 향해 폭죽 한 발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오오, 시작했다 시작했어."
우린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러모로 오늘은 눈이 호강하는 날이었다.
"선생님, 고마워요."
"뭐가?"
"절 사람처럼 대해주셔서요."
"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사람이라고."
그녀는 쓴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도 전, 로봇이잖아요. 헤헤헤..."
폭죽의 붉은빛이 그녀의 뺨을 물들였다. 오묘한 기분이 감돌았다.
"그냥 사람해도 돼."
고개를 젓는다. 갑작스럽게 순응하는 그녀의 태도가 적응이 안됐다.
"제가 길거리에서 부서졌을때, 최초로 슬프다는 게 뭔지 알았어요. 저희 세카이들은, 모든 변수를 스스로 만들 수 있어요."
다시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였다. 하늘에선 폭죽이 엄청나게 터지고 있었다.
"며칠 지나지 않은 지금, 전 최초로 행복한게 뭔지 알 것 같아요."
"이봐..."
"고마워요 선생님. 저 같은 로봇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셔서. 내일이죠?"
그녀는 자신이 자성관리기계에 사용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작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잊지 않을거에요. 기억장치가 없어도, 전 기억할거에요. 지금 이 순간순간을. 선생님도 기억해주셔야해요. 저희가 가까이 있지 않아도, 서로 기억함으로써 함께있는거에요. 알겠죠?"
말을 못했다. 목에 뭔가 걸려서 말이 안나왔다.
"알겠다고 해줘요. 364억년 뒤에 돌아올테니까..."
"됐어, 내가 살아있을 땐 못돌아오는거잖아."
"그, 그럼 바다가 파랗게 되면 돌아올테니까요... 네? 기억해주세요. 제가 너무 주제넘은 부탁을 하고 있지만, 이건 부디 들어주셨으면-"
난 얘기를 더 이상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일순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나, 하늘에 터지는 거대한 폭죽에 시선은 곧장 그쪽으로 쏠려버렸다.
세카이가 뭐라 말했지만, 폭죽이 터지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난 그대로 도망치듯이 해변가를 나왔다. 왜 이러는지는 나도 몰랐다.
집 근처까지 오고 있으면 세카이가 뒤에서 돗자리와 남은 먹을 것들을 들고 졸졸졸 따라오는게 느껴졌다. 어느새 불꽃놀이도 끝나있었고, 도로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같이 가요 선생님-"
난 또 그새 유약해져서 세카이가 들고 있던 물건들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더 이상 내게 부탁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문정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중추회로에 관한 것이었지만, 부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보면 관람차의 그 열기는 세카이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신발을 벗은 뒤 소파에 들고있던 것을 내려놓는다.
"배 안고프냐? 뭐 먹을래?"
말이 없다. 현관문 쪽을 바라보니 세카이는 멈춰있었다. 중추회로가 명을 다한 것이다. 조금은 더 움직여줄줄 알았는데, 갑자기 엄청난 후회가 몰려왔다.
"...하아."
눈이 축 쳐진 채 서운한 표정, 모래가 덕지덕지 묻은 바지, 반쯤 뜯어진 샌들에 얼룩이 조금씩 묻은 민소매 티까지, 보고 있으니 괜히 울음이 나와버렸다.
왜 더 잘해주지 못했을까?
"기억할테니까. 너도 그 잘난 CPU로 기억해. 알았어?"
기동하지 않는 세카이에게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 있던 물건을 치운 뒤 그녀를 소파로 옮겼다. 얼굴을 움직일수가 없어 계속 서운한 표정이었기에 기분이 울적해졌다. 거실로 들어가 냉장고 구석에 박아놨던 술을 꺼내 마시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
.....
일어나면 아침 10시가 지나있었다.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은 안나고, 책상 위에 엎드려 자느라 허리가 엄청나게 욱씬거렸다. 싱크대 위에 난 창문에서 햇빛이 비추지 않았더라면 좀 더 잤을지도 몰랐다.
"으으... 머리야."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잘 보니 머리맡에 하얀 쪽지가 있었다.
-술도 못하시는 분이 이런 걸 드시면 큰일납니다-
남이사, 내가 위스키를 마시던 말던. 가만 보니 담요도 덮고 있었다. 세카이일리는 없었고, 이런 일을 할 사람은 김유리밖에 없었다.
핸드폰을 열어보면 김유리에게서 두 통의 전화, 모르는 사람과 문정원에게서 각각 세 통의 전화가 와있었다. 나 이렇게 인기 있었을까 싶어서, 각자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로 한다.
[ 일어났어요? CPU는 잘 받았어요. ]
"아아, 담요 고마워요."
[ 흥, 이제 가을이니까 감기조심하라고요. 그런데... ]
"예?"
[ 괜찮다면 내일, 오전중에 시간 좀 내세요. ]
"뭔가 더 하실 말이라도 있습니까?"
[ 그런 건 없어요. 그냥, 사적으로. ]
"데이트 신청이군요."
[ ...대답은 문자로 하시던지! ]
뭐야... 하여간 이상한 여자다. 다음은 문정원이었다.
[ 뭐야, 이제 일어났냐? ]
"어."
[ 세카이는? ]
"가져갔나봐. 옷 다시 돌려줄게."
[ 아니 뭐, 네가 습하습하해도 괜찮아, 내가 살아온 날의 반을 너랑 친구로 지냈는데. ]
"닥쳐 좀..."
[ 세카이 같은 로봇, 새로 구해줘? ]
"필요없어. 당분간은... 아니, 평생 이렇게 지낼래."
[ 사람 마음은 순식간에 바뀐다? 그래 뭐, 필요해지면 연락하고... 언제 밥 한 번 사줄테니까 너무 우울해하지 말고. ]
"그려."
문정원은 포커 페이스였다. 나같은 사람을 한두번 본 게 아니었을테니까.
...다음은 이 의문의 전화번호였다. 누굴까?
[ 여보세요? 이재철씨? ]
"아...예. 누구세요?"
[ 아, 전 심재남이라고 합니다. 유진이에게 물어봐서 겨우 연락했군요. 실례지만 언제 한 번 시간 안되십니까? ]
부장남 같았다. 그런데 그가 내게 무슨 일이 있어서...?
"무슨 일로?"
[ 아무래도 당신을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 ]
장난하냐! 씩씩거리면서 전화를 끊으면, 곧 문자가 날아왔다. 내가 세카이를 일으키는 모습에 성정체성을 깨달았느니 하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남자끼리의 연애는 사양이었다.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여하튼 사양이다!
덮고 있던 담요를 고이 접어 의자 위에 올려 놓고, 테이블에 어질러져있던 술도 냉장고로 넣어둔다. 일상으로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뒤, 숨을 크게 들이맡았다 내쉰 다음 거실로 향한다.
거실로 가자, 어제의 소파에 어제의 세카이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살짝 웃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기동하지 않을테지만, 어쩐지 당장이라도 기동할 것 같았다.
온기라고는 없는 그녀의 얼굴을 만져본다. 정신없이 돌고 도는 세상 속에 불현듯이 찾아온 그녀는, 내 곁에서 날 바라봐줬고, 내 말을 들어줬다. 지금의 나는, 그녀로 인해 내적으로 성장했다.
그녀에게 감사해하며, 세카이 엔드라고 나지막이 말한다. 순간 세카이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