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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판타지

안녕하세요, 올만에 접속하는 슈팅스타입니다.​


오늘 어쩌다가 아방스에 한 번 들렀는데 제 글이 글쓰기 분류 따라 옮겨졌다길래 뭔가 봤더니 제로 어게인의 초안.


제가 무슨 약을 빨고 그렇게 글을 썼는지 이해불능;


오글거려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지라 그냥 바로 삭제했습니다. 요즘 쓴 글은 장족의 발전이었네요. 얽


일단 그 글에 코멘트 달아주셨던 하늘바라님의 손발의 안녕을 바라면서, 제 블로그에 있던 신작? 의 프롤로그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명목은 프롤로그인데 대충 보니 앞으로 이어질 에피소드도 저만큼 될것 같아서 그냥 에피소드 0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

 

 

째깍, 째깍, 째깍…….


"……."


지루하다, 벽시계의 초침의 흐름을 세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분침으로 눈을 옮겼다. 42분. 시침은 멀지 않은 곳에서 12시에 가까운 공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앞으로 18분. 18분만 더 버티면 오늘 하루도 끝이 난다.


"잇 인스파이어스 피플 위드 언 어플리씨에이션 포……."


앞에서 열심히 읽고 있는, 해석할 수도 없고 해석하고 싶지도 않은 영어책의 한 구절을 대충 흘리며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1시간 반쯤 전부터 계속된 정신적인 노동으로 대부분의 아이들은 유체이탈 현상을 겪고 있었다. 뒷줄은 말할 것도 없었고, 앞줄도 전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지 고개도 오락가락했다. 그래, 딱 세 명 빼고.


저 세 명은 이 학원의 이 시간대에서도 이름난 범생이들이었다. 맨 앞줄 중앙의 안경 쓴 밤톨머리 남학생이 '이성준', 바로 오른쪽의 보브컷(맞나?)을 한 여학생이 '정세연', 그리고 그 뒷자리에 않은 짧은 포니테일 여학생이 반장 '박유정'. 저 셋이 앉은 자리를 통칭 트라이앵글이라고 하는데, 저 자리에 앉은 다른 시간대 학생들도 전부 범생이더라-하는 뭔 웃기지도 않는 루머도 있었다.


저들의 놀라운 집중력에 잠시 찬사를 보내고는, 하얀 벽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11시 43분. 고작 60초 지나갔다. 그냥 확 잘까-했다가 관뒀다. 지금은 자도 자는 게 아니겠지. 차라리 저 범생이들처럼 수업을 들어 보자-.


"……따라서 정답은 2번, 더 퍼포즈 오브……."


그리고 그것은 무리였다. 새삼스럽게 집중력의 한계를 깨달은 나는 그냥 수업을 포기하고 다시 눈알을 굴렸다. 혼이 빠져나간 시체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째깍째깍째깍째깍.


"………핫!"


그리고 정확히 3분 지났을 때, 시체더미 사이에서 한 시체가 갑자기 팟 하고 살아나선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으……음……."


상황파악을 막 마친, 되살아난 시체이자(생각이라 다행이다) 내 유일한 여자 사람 친구인 그녀의 이름은 서현-윤서현. 그녀는 앞쪽, 책상, 그리고 벽시계를 한번씩 힐끗 보곤 머리카락을 뒤로 휙 쓸어넘기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대부분이 반쯤 졸고 있어서 그런지 학생들이고 선생님이고 그녀의 행동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


시간은 지겹도록 부지런히 흘러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12시가 다 되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다들 수고 많았고, 빨리 가서 자라."


"수고하셨습니다……!"


시체들이 일제히 부활했다. 그들은 흐느적거리는 팔로 짐을 챙긴 다음 힘겹게 들쳐메곤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갔다.


이 장관 아닌 장관을 보니 생각나는 것이 여러가지 있었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1위라던가, 근데 효율은 하위권이라던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그래, 젠장. 사람은 기계나 다름없네. 소모품이 아니라는 것만 빼면. 근데 사회가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잖아. 그러니까 노동 시간이 어쩌고저쩌고.


그러나 이런 잡다한 생각들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어차피 한 곳이었다. 지루함. 그래, 나는 결국 이 지겹고 지겨운 일상을 벗어나고 싶다는 소망을 온갖 자질구레한 핑계를 덧붙여 합리화하고 있는 것 뿐이었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생각을 접어 구기고 책상 위의 잡것들을 가방에 쑤셔넣었다. 신기하게 몸이 가벼운 나는 가방을 가볍게 들쳐멨다. 어째서일까, 오늘 밤에는 이 무거운 짐짝을 메고도 기분 좋게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았어……."


계단을 내려오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수, 아니 이제 12시니까 목요일. 오늘과 내일만 버틴다면 주말이다. 지루한 반복에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황금같은 주말이었다. 음, 일단 토요일은 푹 잔 다음에, 적당히 시간 나는 애들이랑 놀러…….


"시우야! 김시우!"


유쾌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가 김칫국을 쳐 냈다. 소리가 들렸던 계단 출구 쪽을 내려다봤다. 출구 바로 앞쪽에서 두 명이 날 보고 있었다. 오른쪽에 서 있는, 얼굴에 "졸려 죽겠어."라고 써 놓고 다니는 듯 한 여학생은 예의 윤서현. 그녀 옆에 서서 지금 당장 "나아아아아아아이스!!" 라고 소리지를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남학생은 내 남자 사람 친구 중 한 명인 승현, 한승현이었다. 나는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잘 잤냐?"


승현이는 특유의 유쾌한 어조로 핀트가 어긋난 인사를 했다.


"안 잤어. 신기하게."


"흠? 그럼 그 지겨운 걸 맨정신으로 다 들었어?"


"당연히 아니지."


"그래, 그게 너답지, 브라더!"


승현이가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도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고 가볍게 부딪혔다.


"브라더!"


"0.4초. 그 유치한 짓도 슬슬 그만할 때 안 됐어?"


그 꼴을 보던 서현이는 한심함이 묻어나는 말투로 짜증을 냈다. 이것이 정패턴이다. 브라더-브라더-태클. 2년 전쯤부터인가, 그때부터 시작한 게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다.


"뭐 어때? 재밌으면 땡이지. 안 그래, 브라더?"


"찬성. 이렇게라도 해야 좀 버틸 만 하다고. 그 점은 이해해주겠지, 시스터?"


"누가 시스터야!"


폴짝, 꽁, 꽁, 꽁.


"윽!"


"와우, 트리플 블로우! 시우 경직! 대단한데?"


키가 작은 서현이는 나나 승현이의 머리 윗부분을 세게 때리려면 최소한 발뒷꿈치를 있는 힘껏 들거나, 폴짝폴짝 점프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때리기 편한 팔이나 등짝 대신 머리를 치는 것을 선호했다. 왜일까.


"이제 그만하지……? 나 빨리 자고 싶다구."


서현이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늘어지게 말했다.


"아, OK. 야, 브라더, 너 오늘 어떻게 할 거냐? 버스? 뚜벅이?"


"걸어갈려고. 오늘은 왠지 몸도 가볍고 해서-서현이 넌?"


"편의점에 들렀다 갈 거야……. 같은 길이지?"


승현이가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서현이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에게 꽂혔고,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진 뒤 그녀는 그의 심장에 눈빛만큼 날카로운 비수를 꽂았다.


"그렇게 눈치 없으니까 차이지."


비수가 폭발하는 데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윽, 나, 남의 아픈 추억을……!"


승현이가 가슴을 부여잡더니 몇 걸음 뒷걸음질쳤다. 그의 얼굴색은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붉어지고 있었다.


"응, 아플 새가 있었어? 그냥 광속이었잖아. 그렇게 빨리 차일 줄은-"


"서현아."


늘 하던 대로 말을 잘라냈다. 서현이는 꿍한 표정으로 잠깐 쳐다보더니 다시 돌아섰다.


"흥……알았어, 그만할게. 시우 덕분인 줄 알라구."


승현이는 다시 한 번 가슴을 잡고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땡큐, 브라더."


이 상황이 지속됐을 때 일어났을 일을 상상했는지 진심으로 고마워하고는, 그 넘치던 기운이 쭉 빠진 채로 먼저 거리 너머로 사라졌다.


"이번엔 좀 심한 거 같은데?"


"저쪽이 먼저 했어. 그리고 난 딱 세 마디 했고."


그 세 마디로 일 하나 터트릴 뻔 했던 그녀는 실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옛날부터 무자비한 독설으로 악명 높던 서현이는 약점을 찔러 난도질해 끝을 보는 굉장히 아슬아슬한 화법을 구사했는데, 최근에는 최대한 자제하고 있긴 하지만 기분이 좀 안좋아졌다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입 하나만으로 상대방을 썰어 버렸다.


"……그래, 도중에 멈춘 게 어디야. 이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빨리 가자."


난 내 생각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행동을 적당히 합리화했다. 그녀는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잠시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대답도 없이 그냥 출발했다.

 

 

──────────────────

 


"……."


"……."


조용했다. 고양이 한 마리도 없는 썰렁한 길을 쭉 걸으며, 나와 서현이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엄청난 적막감과 긴장감을 더는 버틸 수 없었던 나는 가벼운 주제의 대화를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편의점 들렀다 간다고 했지? 특별히 살 것 있어?"


"……간식."


"……어떤 거?"


"……글쎄."


"……."


대화는 간단히 끊겼다. 그녀는 나와 이야기를 할 마음 자체가 없어 보였다. 아-또 말 하나 잘못 골랐다가 삐쳐버렸네-. 지난 몇 년간의 경험으로 이 상태에서 놔 두면 더 심각한 일이 터진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다시, 또 다시,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오늘 해야 할 숙제, 기말고사, 반의 분위기 이야기, 여름방학 계획, 들리는 스캔들 이야기, 심지어는 비장의 농담까지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자신의 형편없는 화술을 저주하며 승현이의 금언을 떠올렸다. -안되면 그냥 포기하라구, 브라더. 포기하면 엄청 편해.


"……난 이쪽."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길 따라 가던 중에 서현이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손가락으로 왼쪽 길을 가리켰다. 저기 멀리서 유명 브랜드 편의점이 어두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어……그래. 내일, 아니지, 좀 있다 보자."


그녀는 또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나는 안 들릴 정도로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다음,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살짝 훑어보았다. 불이 들어온 건물 하나 없이, 지나가는 차 하나 없이, 가로등만이 쓸쓸하게 늘어서 있는 텅 빈 길이 있었다. 8시간 쯤 뒤에 벌어질 참극에 대해 생각하며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시우야!"


서현이의 목소리가 멈춰세웠다. 돌아서서 마주보았다. 아까 그 위치에서 몇 걸음 거리만 벌린 채로 그녀는 날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두 손을 앞쪽으로 모은 그녀는 뭔가 할 말이 있지만 쉽게 꺼내지는 못할 말인 듯 답답함과 뭔가 다른 감정들이 마구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응?"


"……요즘, 그-실종사건이 많이 일어나잖아?"


아, 그래. 그랬었다. 최근 이 근방에서 사람이 없어지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분명 오늘 아침에도 뉴스에서 그랬지. 도시 내에서, 그것도 아무런 단서도 없이, 사람이 깔끔하게 실종. 그것도 벌써 7번째다. 표어가 "또 다시 20대 남성 실종……흔적 없어 수사 난항" 이었나. 학교에서도 유령이 잡아갔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지.


"그러니까……조심, 하라구……. 응, 그것 뿐이야, 안녕."


서현이는 그렇게 속사포처럼 말하곤,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부리나케 달려가 사라졌다. 음, 부끄럼? 아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마 기분이 풀린……거겠지? 어쨌든 나와 승현이가 8시간 뒤에 일어날 참극을 그럭저럭 피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다시 갈 길을 갔다.

 


텅 빈 것처럼 보였던 거리는 진짜로 텅 비어 있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0시 10분. 시간을 감안해도 위화감이 들 정도의 적막이었다. 가로등길 너머는 평소에 번화가 축에 속하는 큰 거리임에도 사람은커녕 차 한 대도 지나다니지 않았고, 원래라면 각자의 아름다운 빛을 마음껏 뽐내고 있어야 할 전광판들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이 거리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것은 딱 두 가지, 가로등과 신호등이었는데 가로등은 서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신호등은 혼자 신호를 계속해서 바꾸고 있었다. 마치 유령에게 신호를 보내 길을 인도하는 것처럼…….


생각이 거기에 미치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얼음물이 줄줄 흐르는 듯한 끔찍한 감각과 함께 공포가 거센 파도처럼 밀려왔다. 무의식이 위기를 감지하고 작동하기 시작했다.


짝, 하고 스스로의 뺨을 세게 갈겼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김시우. 유령이 사람들을 데려갔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정말로 그걸 믿어? 정신 차려. 여긴 그냥 한밤중의 길거리일 뿐이라고. 유령은 무슨 유령이야? 다 아무 근거 없는 헛소문이라고. 서현이도 그건 안 믿겠다-.


"……젠장, 그래. 정신 차리자."


무의식이 다시 잠들었다. 공포심과 서늘한 감각을 마구 구겨 머릿속 쓰레기통에 던지곤 그 평범한 거리를 지나가려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거리는 여전히 죽어 있었다. 음, 뭐지. 정전이라도 일어났나? 아니, 가로등이랑 신호등이 있으니까 아니겠네. 그럼 단체 소등이겠군. 안그래도 요즘엔 전력이 부족하다고들 하니까-.


계속 걸어가다보니 언제나처럼 도시의 랜드마크이자 만남의 장소인 하얀 시계탑 광장에 들어섰다. 항상 사람이 많은 이곳도 지금은 조용했다. 들리는 건 광장 중심을 넓게 둘러싼 4개의 분수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뿐이었다. 뭐, 지금은 심야시간대니까 없을 수도 있지. 나는 광장을 가로질러서 쭉 직진했다. 조금만 더 가면 아파트 단지가 나온다.


여전히 깜깜한 거리를 지나가면서 다시 생각의 나래를 펼쳤다. 좋아, 오늘이랑 내일은 좀 편하게 지낼 수 있겠고, 주말은 푹 쉬고 좀 놀다가……그래, 그러고보니 기말고사가 얼마 안 남았다. 지금까지 해온 게 있으니까 평타는 치겠지. 깊게 생각하진 말자. 시험이 끝나면 방학이 기다린다. 보충 수업이 좀 있지만 뭐 어때? 음, 것보다 아직도 거리가 어둡다. 보통 소등을 몇 분 정도 하지? 30분? 어디, 지금이 25분이니까--.


"……?"


왼쪽 바지주머니에서 긴 진동이 일었다. 메세지. 서현이에게서 온 메세지다. 좋아, 오늘 운명이 여기서 확실하게 결정되겠군. 새삼스럽게 긴장을 하며 잠금을 풀고 내용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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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w8x:dh3P@“vT2km$,38=ytV-q7;!<b

"…………허?"


오류, 인가? 연달아 온 3개의 메세지의 내용은 모두 박살난 상태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통신사 쪽에서 뭔가 오류라도 일으켰나? 일단은 답장을 썼다. ‘글씨 깨졌어. 다시 보내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b'ㅓt+ㅣㄴ;1A?ㅟrh2ㅎ9VㅁA#;Hㅐ^,+0

e,ciㅏㅇw!=/Yㅇ8):도ㅁ1*Z4,:7ㅊ=ㅕ/).%

ㅅㅣ,t~8nㅏㄴ!ㅇ1:ㅓㅂS=(3d어vG+ㅃㅏㄹ$@ㅣ'db~


더욱 더 괴상한 텍스트였다. 하, 벌써부터 폰이 맛이 간 건가? 산 지 2년도 안 되었던 거 같은데.


그만. 그만 해. 무의식이 생각을 끊었다. 호기심이라고 해야 할지, 불안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건 뭔가 중요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중요하다. 무의식과 직감이 함께 외치고 있었다.


좋아. 바로 옆의 가로등에 기대서 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서현이는 대체 뭔 말을 하려고 했을까? 온갖 난잡한 텍스트 속에 한글이 섞여 있었지. 만약 그게 원본 메세지에 쓰여있던 것이라면? 아니, 아니야, 깨진 텍스트의 양에 비해 한글의 양은 턱없이 부족했다. 다른 알파벳같은 것들도 원래 메세지의 일부였을 테니까 저걸 따로 떼어서 써 봐도 원래 내용을 유추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한글들이 원래 서현이가 보냈던 내용이고, 에러든 버그든 뭐든 간에 그 사이에 다른 텍스트들이 끼어들었다면? 한글들을 이어붙이면 원래 내용과 가까울 확률이 크다. 그래, 그러고보니 서현이는 똑같은 메세지를 두 번 보냈을 텐데, 알파벳들은 달라졌네. 젠장, 그냥 처음부터 한글을 이어봤으면 편했을 텐데. 드디어 생각을 정리하고 메세지의 한글 조각을 보았다.


"어, 인, 위, ……흐……? 음, 애, 아, 돔?"


몇 번을 반복했지만 도저히 알아먹을 수도 없었고 내가 정확하게 읽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대로는 도무지 답이 없다. 전화기 모양의 아이콘을 꾹 눌렀다. 본인에게 직접 들어 봐야지, 뭐.


………….


"…………음?"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것은 서현이가 좋아하는 R&B 풍의 음악도, 평범한 다이얼 소리도 아니라 그냥 버저음 비슷한 리드미컬하고 기분나쁜 소리였다. 좀 이상한걸. 전화가 걸리지도 않는 것 같은데. 대체 뭐야? 전파는 멀쩡히 터지는데?


별 수 없이 혼자 해석하기로 하고 노트 어플리케이션을 켰다. 그리고는 메세지를 그대로 노트에 옮겨 다른 문자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ㅓ ㅣ ㄴ ㅟ ㅎ ㅁ ㅐ

ㅏ ㅇ ㅇ 도 ㅁ ㅊ ㅕ

ㅅ ㅣ ㅏ ㄴ ㅇ ㅓ ㅂ 어 ㅃ ㅏ ㄹ ㅣ

"……하아."


순간, 쓸데없는 직감에 휘둘려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하다면 왜 그렇게 중요하지? 서현이가 대체 나한테 뭐라고 하고 싶은 거야? 좋아. 잘 생각해보자. 이성적으로, 천천히.

 


"……요즘, 그-실종 사건이 많이 일어나잖아? 그러니까……조심, 하라구……."


머릿속의 서현이가 되풀이했다. 서현이가 보낸 메세지니 관계가 있을 것 같다.

실종자들은 사라지기 직전까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아니, 남길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자연스러울까? 왜? 그들은 어떻게 사라진 걸까?


"……."


이 거리는 정말로 단체로 소등한 것일까? 왜 나는 이걸, 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거리를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을까?


"………."



결정적으로, 왜 이 거리에는 나 말고 다른 움직이는 것이 없는 걸까? 차도, 사람도, 동물들도, 아무것도 없다. 왜?


"…………."

 


반짝. 뇌가 반응하는 느낌. 숨이 가빠진다. 등줄기를 타고 격렬한 전율이 흘러간다. 사고회로가 빠르게 가동되고 있다.


답은 간단했다. 전부 다 틀렸다. 거짓이었다. 불가능했다. 어떻게 평일에 30분씩이나 소등을 할 수 있고, 아무리 심야라지만 돌아다니는 게 하나도 없을 수가 있으며, 실종된 사람들이 어떻게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고, 아무런 단서도 없을 수가 있는가?


물론 상식적으로, 이것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아니면 이 사실을 '그럴듯 하게' 설명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비상식'이라면 어떨까?

일단 비판적인 사고는 접어두고, 학교에서 도는 소문대로나 내 직감대로, 유령이나 다른 어떤 비상식적인 것이 사람들을 잡아갔다고 가정해보자.


인터넷에 떠도는 터무니없는-아니, 젠장, 볼 만한 괴담 중에 '다른 세계'에 관련된 괴담이 있었다. 다른 누구 없이, 자신 혼자만이 존재하는 세계.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도하는 세계. 옛날 중학교 시절에 관련된 것들을 자세히 파본 적이 있었다.


기억이 맞다면, 이 '다른 세계'에 다녀왔다는 주장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특정한 기물, 예를 들면 전등이나 가로등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둡다. 그러니까, 빛을 내지 않는다. 둘째, 원래 있던 세계와 전파통신망으로 교류가 가능하다. 셋째, 아무리 찾아다녀도 살아있는 생명체는 자신뿐이다. 그리고 넷째, 형용할 수 없이 음침한 어떤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보통은 다양한 방법으로 직접 이동하지만, 만약에 내가 서 있는 이곳도 원래 세계가 아니라면? 내가 모종의 이유로 그 '다른 세계'로 이동했다면? 지금 거리의 상태나 사람이 없는 이유를 한 방에 설명할 수 있다.


또, 사람들이 실종되면서 아무런 단서도 남지 않은 것도 이쪽의 세계로 와 버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유령이 이동시켰던가, 그냥 갑자기 이동되었겠지. 나처럼. 그래서 원래 세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세계는 이론 상 무한하고(아, 이건 상식), 따라서 '다른 세계'도 무한하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 모두 각각 자신만이 존재하는 세계로 이동했다고 가정해봐도 무방할 것이다.


원래 세계로 돌아오려면 들어올 때 했던 행동을 역으로 해야 한다는 설이 가장 많았는데, 이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의식 등을 행한 게 아니므로 저절로 다시 돌아오던가, 다른 방법을 찾아 돌아오던가, 아니면 여기에 계속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최초의 실종자는 3주 전에 사라졌고, 지금도 사라진 채이다. 보통 3주 동안 가만히 앉아서 울고 있을 사람은 없으니, 뭔가 대책을 강구하기 마련. 지금쯤이면 올 때도 되었는데 왜? 왜 아직 그곳에 있을까?



그런 생각에 도달한 순간,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무시무시한 한기가 쓱, 하고 훑어 지나간 것 같았다.


폰을 보았다. 서현이가 하려던 말의 파편들이 그대로 떠 있었다. 확실했다. 믿고 싶지 않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에-만약에, 내 생각이 사실이라면……사실이라면.

 

그 실종자들은 대부분, 아마 살아 돌아올 수 없겠지.


ㅓ ㅣ ㄴ 위 험 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그 '음침한 소리'. 그래, 그것이다. 그것의 주인이 무고한 사람들을 집어 삼켰던 것이다. 

ㅏ ㅇ ㅇ 도 망 쳐

아마도 그 '괴물'은 이, 또 다른 세계의 원주민일 확률이 클 것이다. 그래, 젠장. 이것 때문이었냐? 그게 사실이라면 그 말은 곧-


시 간 없 어 빨 리

이 세계에도, 똑같은 괴물이 존재한다는 뜻--.


"……!!"


몇 초가 흐르기도 전에, 몸이 전율하기도 전에, 감각이 정상화되기 전에, 난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그 '형용할 수 없이 음침한' 소리가 어떤 것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아니, 꽤 가까운 거리에서, 그러니까 도로의 끝에서 들린 그 역겨운, 가가가각, 하는 끔찍한 소음. 성대가 깨져나간 소리라고 하면 적절할까? 토사물에 적신 소리라고 하면 적절할까?


"그가가가가각!!"


비정상적인 속도로 그 소음이 커지고 있었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도 전에, 다리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최대한 포효와 멀리 떨어지고자, 무작정 뛰었다. 미친 듯이 달려나갔다.

그게 헛수고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건물과 건물, 가로등과 가로등이 스쳐 지나가는 동안 그 괴물이 고래고래 내지르는 소리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왼쪽, 오른쪽, 오른쪽, 왼쪽. 내 다리는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있지도 않은 도주로를 따라 필사적으로 뛰고 있었다.


이성적인 의식을 유지하느라 미칠 것 같은 뇌를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도망치는 것은 의미가 없어. 어차피 언젠가는 따라잡힐 거야.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 하. 뭐 어쩌겠어.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 괴물을 없애는 것.


도망칠 수 없다면 맞서 싸워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어쩔 수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어떻게? 그 괴물은 평범한 동물 같은 게 아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맨손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뭔가, 뭔가 적당한 무기 같은 것이 필요했다.


"크, 하, 하아……!"


그러는 동안 뜨거운 숨이 목 안에 차오르고 있었다. 산소 부족으로 다리가 천천히 멈췄고, 나는 드디어 내 팔다리를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쿵쾅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차가운 공기를 열심히 들이마셨다. 서현이의 말대로, 시간은 얼마 없었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쓸만한 것이 있기를 바랬다. 가까운 곳의 시청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텅 빈 주차장과 정원. 그 뒤의 건물 입구쪽에 녹슨 공용 청소용구함이 놓여져 있었다.


"후, 그래, 저거……!"


최대한 빠른 속도로 걸어가서 문짝을 떼어내듯이 열었다. 짧은 빗자루와 긴 쓰레받기, 금속 집게들이 들어 있었다. 아니, 그것 말고 하나가 더 있었다. 긴 걸레 자루. 금속제다. 살짝 들어 보니 굉장히 가벼웠다.


"빙고……!"


아마도 이건 지금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일 것이다. 곧바로 양손으로 꽉 쥐었다. 옛날의 기억을 되살려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각오를 다졌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물러설 수도 없다.

 

그 쓰레기가 어떤 녀석이든, 난 그걸 쓰러뜨려야만 한다. 이대로는 8번째 실종자가 될 뿐이다. 울렁대는 가슴을 압박하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무시하면서, 뒤돌아서서 저 멀리서 다가오는 구역질나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그건 정말로, '괴물' 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큰 개를 베이스로 다른 이상한 것들을 박아 넣은 모습이라고나 할까? 일단 까맣다. 손전등을 비춰도 순흑색으로 보일 것 같이 까맣다. 머리에 돋아있는 거대한 뿔은 보랏빛의 괴기한 빛을 내뿜고, 붉은 구슬 같은 눈깔 세 개가 툭 튀어나와 있다. 2개의 입은 쭉 돌출되어 있었는데, 의외로 송곳니는 없었고 입맛이라도 다시고 있는지 끈끈해 보이는 액체를 줄줄 흘리고 있다. 두 쌍의 다리 끝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날을 세우고 있고, 긴 꼬리는 마치 이 세계의 물질이 아닌 것처럼 활활 타오르듯 위로 휘날리고 있었다.


"가각! 카가가가각!"


선전포고. 확실했다. 괴물이 이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왔다.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순식간에 주차장 안에 들어온 놈은 각도를 고쳐잡고 다시 뛰어들 태세를 취했고,


"……큭!"


놈의 형태가 흐릿해지는 순간 왼쪽으로 피했다. 눈부신 섬광이 셔츠 끝을 스쳤다. 상상 이상으로 빠르다.


"타앗!"


"가각!"


틈을 놓치지 않고 내려쳤지만 무기는 허공을 갈랐다. 괴물은 비웃듯이 방향을 틀어, 들이받는 대신 달려들었다. 면도날 같은 발톱이 뿔의 빛을 받아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큭!"


가로로 내질러지는 빛의 단검을 뒷걸음으로 피하고, 다시 날아드는 제2격은 무기로 가까스로 받아냈다. 까앙! 두 흉기 사이에서 찢어지는 충격파가 일었다.


"가악! 가가각!!"


쉴틈없이 이어지는 제3격과 제4격. 무거운 일격을 계속해서 막아냈다. 카앙, 까앙!! 반동으로 튕겨나면서도 괴물은 제5격을 준비했다.


"크, 으아아아!!"


놈이 앞다리를 뒤로 드는 순간에 재빨리 옆으로 피하고는, 힘을 실어 그대로 올려쳤다. 놈의 턱에서 퍼억, 하는 맑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가악!!"


첫 번째 유효타. 괴물이 뒤로 물러섰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곧바로 앞으로 발을 내딛어 거리를 좁혀 머리를 내리쳤다.


"차아앗!"


빠악, 경쾌한 타격음이 생생하게 울렸다.


"가가가각! 카아악!"


순식간에 두 방을 얻어맞은 놈은 뒤로 크게 물러났다. 그 역겹고 그로테스크한 눈깔들이 잠깐 동안 일그러지더니,


"그가아아아아아악!!"


끔찍한 포효와 함께 원상태로 돌아오면서, 뿔에서 보라색 빛이 사라지곤 그 빛이 발톱 쪽으로 이동했다. 빛이 발톱을 감싸며 길게 모여서, 길이가 2배 정도로 길어졌다. 나는 그것을 놈이 방심을 접고 제대로 덤비겠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타는 듯한 갈증. 마른침을 삼키며 무기를 더욱 꽉 쥐었다.


"카각!"


괴물은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직선상으로 달려들 것이라고 예상한 나는 곧바로 옆으로 달렸다. 예상대로, 놈은 방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곳에 뿔을 세우고 있었다.


"타앗!"


"가가각!"


놈은 너무나도 손쉽게 공격을 피한 후, 다시 한 번 단검을 내질렀다.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그것을 쳐냈다. 아까보다 신속하게 제2격이 이어졌다. 길쭉한 광검이 눈 앞으로 날아온다. 고개를 젖혀 간신히 피한 다음, 놈 대신 내가 제3격으로 온 힘을 담아 내려찍었다. 놈은 발톱을 교차해서 너무나도 간단히 막아냈다.


"크, 으으으……!"


"카아악! 카악!"


까가가가각!! 찢어지는 금속음이 귀를 파고든다. 연한 바이올렛 빛이 막대를 따라서 위로 솟구치다가, 일순간 치고 올라오는 발톱들에 나는 무기를 놓쳐 버렸다. 막대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우왓……!!"


"가가각!!"


괴물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놈이 두 발톱을 한 번에 휘둘렀고, 동시에 파고드는 밝은 빛무리가 내 몸뚱이를 조각내기 직전,


"크, 저리 꺼져!!"


눈 앞에 보이는 놈의 그 더러운 머리를, 정확히는 턱 밑을 있는 힘을 다해 걷어찼다.


"가아아아악!! 가각!!"


그건 진짜로, 살점이나 뼈 같은 게 아니라 뭔 기괴한, 형용하기 힘든 느낌이었다. 빛무리가 양쪽으로 흩어지며 괴물이 뒤로 날아갔다. 가까스로 찬스를 잡은 나는 날쌔게 뒤로 빠졌다. 하늘을 본다. 걸레자루가 아직도 돌고 있었다. 점프, 캐치. 놓쳤던 무기를 다시 잡았다.


"가악!! 가가가각!"


쓰러졌던 괴물은 재빨리 다시 일어서서는 갑자기 자세를 낮추더니, 느닷없이 높이 뛰어올랐다.


"뭐야?!"


"카아아악!!"


시선으로 놈을 쫒았다. 공중제비를 돌던 괴물은 마치 격투게임의 필살기마냥, 두 발톱을 교차해서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당연히, 나는 뒤쪽으로 멀리 물러섰고-


"가가아악!!"


"……하, 아?!"


놈이 갑자기, 빠르게 착지해서 이쪽으로 돌진했다. 뭔가 좀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할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무기를 앞으로 휘둘렀다. 까아아아앙-! 하는 높고 날카로운 소리에 이어서, 밝은 섬광이 눈 앞을 지나더니, 손에서 빠져나간 걸레자루는 말 그대로 깨졌다. 조각난 파편들이 위로 솟구치며 이마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괴물은 그대로 발톱으로 두 번째 공격을 가했다. 피해야 한다, 몸을 뒤로 확 젖혔다. 셔츠의 앞부분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이……자식이!!"


"가칵……가아아아악!"


세 번째가 날아오기 전에 나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괴물의 목을 잡아 세게 던져버렸다. 혼신의 힘이라도 담겼는지 진짜로 멀리 날아간 괴물은 시청 벽에 보기 좋게 내동댕이쳐졌다.


"……이런……!"


서둘러서 막대기의 잔해를 찾았다. 뒷쪽 땅바닥에 처량하게 떨어져 있던 소중한 무기는 마치 금속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것마냥,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히 박살나 있었다. 부서질 때 내 손이 말짱했던 게 이상할 정도였다.


"가아각……."


괴소리가 다시 들렸다. 저 멀리서 빛을 다시 뿔에 집중하고 있는 괴물이 보였다. 좋아, 침을 탁 뱉고 중얼거렸다. 여기서 갈린다. 어떻게든 피하고 다른 무기를 집어 반격의 기회를 따낼 것이냐, 아니면 내 앞의 7명이 그랬던 것처럼, 미스터리만 남긴 채 8번째 희생자가 될 것이냐.


"후……와라……!!"


"카아아아아……."


아까 발톱에 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뿔에 빛을 모아 길게 만들 놈은 다시 한 번 돌진 자세를 잡고는, 보라색 빛줄기가 되었다.


눈 앞의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며, 괴물의 그 끔찍한 모습이 뇌리에 천천히 새겨진다. 처음보다 훨씬 빠르다는 걸 깨달았다. 시선이 뿔로 향한다.


저걸 피해야 해,

 

뇌가 명령하지만 너무 느리다. 빛이 달려온다. 곧 저것이 자신을 꿰뚫는다는 직감이 들어서였을까? 온몸이 반응하지 않는다. 움직이는 건 눈알 뿐.

 

끝났다, 머리가 결론을 내렸다. 힘이 쭉 빠지지만 쓰러지진 않는다. 응시한다. 그 날카로운 끝을. 빛이, 죽음이, 마침내, 코 앞으로 다가온다--.



파바박.


"……어……?!"


"……가가아, 각……!!"


뿔이 내 가슴에 닿기 직전, 놈의 머리에 새까만 철조각 같은 것이 세 차례 꽂혔다. 괴물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크게 경련하더니, 그대로 푹 쓰러졌다. 괴물은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머릿속의 핑크색 젤리가 판단하기도 전에 나는 본능적으로 확 뒤돌아봤다. 멀지 않은 곳에 뭔가의 형체가 보였다.


"…………."


그리고 그곳에 있던 것은, 가느다란 오른팔을 쭉 뻗은 채 땅으로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천사' 였다.


까맣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색채는 검정색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올 듯한 길고 까만 머리칼은 불어오는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며, 마찬가지로 깊은 어둠이 담긴 눈동자에는 맑은 빛이 어려 있었다. 마치……젠장,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그래, '밤'을 형상화한 것 같은 디자인의 프릴 드레스는 그녀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며 까마귀를 연상시키는 까만 날개는 오히려 신성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은은한 달빛을 배경으로 내려온 그 검은 천사는 마침내 착륙을 마치고 날개를 접었다.


"하아, 후아, 하아……."


천사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 거칠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급하게 날아온 것일까? 날 구하러? 어떻게? 왜?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이, 그저 이런 생각들이나 하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아, 흑……. 으흑……!!"


숨소리가 어느새 흐려졌다. 흐느낌.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천사는 울고 있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턱선을 타고 반짝이는 보석이 또르르 굴러 톡 떨어졌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걸 보고 뇌가 급속도로 사고회로를 복구했다.


"저, 저기……괜찮--."


탁탁탁, 하는 발소리에 처음으로 튀어나온 정상적인 말이 묻혔-


"……어?!"


와락, 하고 안기는 느낌. 부드럽다. 기껏 진정된 뇌가 다시 달아올랐다.


"으흑, 흑, 으아아아아아아앙……!!"


천사는-천사는, 나를 꼭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울음을 터뜨렸다. 사고회로가 좀 거칠게 돌아간다. 아니, 잘 돌아가지 않는 것 같다. 이미 이해를 포기한 뇌는 이성을 배제하고 감성에 치우친 명령을 내렸다.


"흐앙, 아아아아앙……!!"


뇌가 내린 명령은 무시되었다. 몸이 명령을 거부했다. 정확히는, 응답하지 않았다. 천사는 그렇게 한참 동안 울었고, 난 그냥 그 자세 그대로 경직되어 그 여린 소녀가 울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흑……으흑, 하아, 다행……."


조금 진정됐을 때, 그녀가 울먹이며 낸 속삭임이었다.


"크, 흑……다행, 이야……흑……! 안 늦었어……안 늦었어……!!"


…………뭐?


"으흑……하아, 하아……."


천사는 그 말을 한 후 잠시 뒤에 드디어 울음을 멈췄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며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살짝 들어 내 쪽을 봤ㄷ

순간, 형언할 수 없이 차가운, 극한까지 얼어붙은 거대한 창이, 심장을 푹 꿰뚫은 것 같았다.

말문과 사고회로가 동시에 막혔다. 이성 수치가 한순간에 정상치로 올라갔다. 심장에서부터 퍼져나간 냉기가 온몸을 꽁꽁 얼렸다. 시선이 한 점에 고정된다.


뭐야. 대체 뭐야. 이게, 뭐냐고. 이-이, 이게 말이 돼?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왜? 진짜로? 내가-내가, 설마 잘못 보고 있는 게--아니었다. 그녀는, 그녀는-진짜였다. 그녀는 내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익숙한,


"…………서, 서……."


"……."


뒤에 나올 말을 예상한 듯, 검은 날개의 소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서현……아……."


"……."

그 얼굴은 틀림없이 내가 아는 그 서현이, 윤서현의 얼굴이었다.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한 번 살펴봤다. 천사의 체구는 그 날개로 몸을 완전히 감쌀 수 있을 정도였는데, 어림짐작으론 비슷했다. 또 머리카락의 길이도, 나와의 키 차이도, 그리고 두르고 있는 분위기마저도 거의 같았다. 가만 생각해보면 목소리도 비슷한 것 같다. 이렇게 모든 정보를 머리에 때려넣고 돌려서 나오는 건 역시 '윤서현'. 뇌가, 직감이, 확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너, 뭐, 뭐, 뭐야……?! 저-저-저, 정말로……?"


"……응."


천사가 아직까지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몇 걸음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그러고는 손끝으로 아직 맺혀 있던 눈물을 쓱 닦아낸 후, 드레스 끝을 잡고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고풍스런, 하지만 어딘가 조급함이 느껴지는 인사를 했다.


"나는, 윤서현. 열여덟 살 윤서현. 2학년 7반 14번 윤서현. 시우와 승현이의 친구 윤서현."


확인사살. 머리가 멍해서 그런가, 뇌가 포기해서 그런가, 아까의 감정이 너무 빨리 진정된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서현이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밤의 마녀' 윤서현."


밤의 마녀. '마녀'.


그 단어가 대체 무슨 뜻인지 정확히 파악하기도 전에, 서현이는 내 손을 붙잡았다.


"일단,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자.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라서……."


"어, 어? 으, 응……."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대답했고, 서현이는 살짝 밝게, 그러나 씁쓸한 느낌의 미소를 지었다.


"좋아……그럼,"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


"………어……? 아……!!"


그 직후, 세계가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시청이 무너져 편의점이 되고, 나무가 쪼개져 가로등이 되고, 정원이 가루가 되어 도로와 인도가 되고, 저 멀리 보이는 하얀 시계탑이 갈라져 백화점이 되었다. 곧이어 서현이의 까만 드레스도 순식간에 우리 학교 교복으로 바뀌었고, 내 걸레짝 와이셔츠도 새것이 되었다.

 

나는 주변의 모든 것이, 어느 한 순간, 정확히는 나와 서현이가 갈림길에서 갈라졌던 그 순간의 것으로 복구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딱 하나, 그 끔찍한 괴물의 시체만은 까만 구체로 변해 나와 서현이 사이에 둥둥 떠 있었다.


"자, 끝. 빠르지? 지금은 목요일 0시 8분. 네가 '움브라' 에서 헤매고, 이 괴물……'나이트메어' 와 싸웠던 일 같은 건 전부 없던 일이 됐어."


"……움브라……? 나이트메어……?"


나는 말 그대로 벙쪄서 멍하니 서 있었고, 서현이는 가방에서(아, 그래. 나 가방 메고 있었다-) 웬 딸기잼 병 같은 걸 꺼내서 그 새카만 공 같은 걸 담고 있었다. 힐끗 본 내 얼굴이 상당히 우스꽝스러웠는지 그녀는 쿡쿡 웃으면서,


"뭐, 괜찮아. 어차피 내일이면 잊어버릴 테니까. 아침에 봐!"


하고는 다시 편의점 쪽으로, 이번에는 여유 넘치게 걸어갔다.


…………….


"………대체 뭐야, 이거……?"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더 비상식적으로, 그것도 급속도로 진행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강한 충격을 너무 많이, 연쇄적으로 받아서 판단능력이 박살났는지, 나는 방금 일어났던 일을 정리할 엄두도, 자신의 머리통을 한 번 세게 쳐 볼 엄두도 못 내고 그저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       >>


 

……여보세요?


네, 선배. 전데요, 깨 계셨네요.


응……그러게, 아직도 안 자고 있었네. 무슨 일이야?


본론부터 말씀드릴게요. 방금, 새로운 '마녀' 가 발생했습니다. 저희 학교 학생인 것 같고요, 이름은-


윤서현. 2학년 7반의. 맞지?


……예상하고 계셨던 모양이네요?


그래. 너도 알고 있었잖아? 그 애는 그렇게 될 거라는 거. 그것보다 '근원'과 '속성'은? 예상대로야?


근원은 '밤'. 일치하고요, 속성은 '무'. 불일치입니다.


흠……근원이 밤이면 속성은 당연히 '어둠' 일 줄 알았는데……. 역시 어둠은 '나이트메어' 만의 것일까?


글쎄요. 근원의 이미지가 순수한 어둠과 가까운 건 이번이 처음이라. 대체, 그 속성이란 건 어떻게 정해지는 걸까요?


음……일단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내일 하자. 다른 거 또 있어?


……아, 네. '밤의 마녀' 가 탄생하기 전에, 일반인 한 명이 또 '움브라' 에 끌려들어갔었던 모양이에요. 이름은 '김시우', 저희 학교 2학년 3반 소속이구요, 나이트메어와 격투를 벌인 듯 합니다.


……그건 좀 믿기 힘든 걸? 맨몸으로 나이트메어랑 싸우다니……. 그 애, 지금 살아 있어?


네. 멀쩡히요. 움브라의 시작점과 마녀가 탄생한 지점이 거의 일치하는 걸로 봐선, 제 생각엔 아마 김시우 때문에 윤서현이 마녀로 각성한 것 같아요.


응……그런 것 같네. 것보다 큰일인걸. 일반인이 점점 더 많이 끌려가고 있어. 우리가 손쓰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성준아, 지금 서현이와 통화할 수 있어?


아뇨, 선배. 전 그 애 연락처가 없어요.


너 서현이랑 그, 시우라는 애랑 같은 학원 다니는 거 아니었어?


아시잖아요, 저 여자애들이랑 안 친한 거. 그리고 뒷줄 애들은 잘 몰라요. 선배도 연락처 없으세요?


응. 서현이는 꽤 철저한 애여서 말이야……. 유정이나 세연이가 갖고 있을……리는 없겠고. 뭐, 내일 물어보면 되겠지. 다른 건?


이제 없어요.


그래? 그럼……수고했어, 성준아.


별 말씀을. 선배야말로 수고하셨어요. 그럼, 이제 끊을게요.


그래. 내일 보자~

 

───────────────

 폰으로 수정하기 무진장 힘드네요.


어쨌건 제목도 안 정해놓고 대충 아무생각 없이 쓰던 글인데 어느새 이렇게 되버렸습니다.


제목이야 나중에 정하면 되는 거라 일단 '프로젝트 NL(Nameless)' 라고 해놓았고요


강제개행은 블로그에서 가독성을 위해 해놓은건데 폰으로 보면 여기는 띄어쓰기 간격이 무진장 넓게 보여서 어떻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폰으로 다 지우는건 무진장 힘드니..


따옴표 쳐진 용어들은 에피 1에서 설명할 예정이니까 그렇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어쨌든 여기까지 슈팅스타였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Who's 슈팅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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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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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바라KSND 2014.12.19 10:16
    반갑습니다 ㅋㅋㅋㅋ
    14일 글을 지금 보네요.


    상전벽해!
    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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