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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형이 네 이름 맞지?"


우린 사창가에서 벗어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난 체력이 달려서 그런건지 산을 오르는게 굉장히 힘들었지만,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눈 앞의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르고 있으니 황당할 뿐이었다.


"일단, 좀, 쉬자. 에휴! 난 못 걷겠어."


"그럴까?"


근처에 벤치가 보였기에 쓰러지듯 몸을 옮겼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얼굴이 미남형이었다. 코 왼쪽에 난 점이 없었더라면 완벽했을 것이다. 갸름한 얼굴형을 가지고 있었지만 머리는 상고머리였다.


"난 안형진. 여기 오기 전엔 평범한 공대생 4학년이었지."


"흐응. 무슨 과 전공했는데?"


"컴퓨터 소프트웨어. 가서 하는 일은 술퍼마시기밖에 없지만."


"그 교수에 그 제자네."


형진은 뭐가 웃긴건지 히죽댔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르고, 우린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산을 왜 올라가는거야?"


"비밀 아지트로 가려고. 줄여서 비트."


"흐응. 거기에 날 왜 데리고 가는건데?"


"너 지금 갈 데도 없잖아? 걱정하지마. 비트엔 너같은 사람들이 조금 있으니까."


웬지 그에게 속는 기분이 들었다.


산 중턱에 다다르자, 그는 분위기에 맞지 않는 맨홀뚜껑을 열더니 나를 데린 채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사다리는 녹이 심하게 슬어서 금방이라도 부숴질 것 같았다. 다행히도 지하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짧았기에 난 죽을 걱정 없이 비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 옷을 좀 갈아입고 싶은데."


"조금만 기다려. 야! 상혁아! 데려왔어!"


형진이 누군가를 부르더니, 곧 키가 작고 안경을 쓴 범생이형 남자가 하나 나타났다. 상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 같았다.


"오, 저분이 민형씨인가. 반갑습니다. 비트의 엔지니어를 담당하고 있는 유상혁이라고 합니다."


"머신은 어떻게, 잘 되고 있냐?"


"완벽하지. 따라와봐. 민형씨도 이쪽으로..."


우린 유상혁을 따라서 비트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비트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 여러 방들이 나열되어 있는, 이른바 학교식 동선을 취하고 있었다. 복도 끝까지 걸어가면 막다른 곳이 나오는데, 상혁이 벽을 조금 더듬자 벽은 자동문처럼 옆으로 밀려들어갔다.


"민형씨. 여기가 연구소 입니다. 현재 어른랜드 안에서 쓸 수 있는 타임머신을 개발하여 어른랜드 곳곳에 갇힌 분들을 민형씨처럼 데려오고 있습니다."


"대단하네요. 현실에서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게 아쉽게도, 현실에서는 구조체계가 흐트러져서 가동하면 바로 폭팔하더라고요. 여기선 이상하게도 이론이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작동이 된답니다."


모르는 소리였다. 김민호 녀석이라면 알아들었을지도 모른다. 상혁은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 한 분이 편의점을 가셔서, 머신 가동은 조금 뒤로 미뤄야겠네요. 형진아, 미안한데 예진이 오면 김밥좀 가져다줄래? 내가 조금 바빠야 말이지."


"알았서 똥꼬야. 이민형 너는 따라와. 여길 대충이라도 소개시켜줘야하잖아?"


난 말하지 않은 채 형진을 쫓아갔다. 형진은 사다리가 있는 복도의 처음 지점으로 돌아가더니, 다시 방향을 틀어서 복도 왼쪽에 붙어 걷기 시작했다. 복도 왼쪽 벽에 붙은 첫번째 문에는 '화장실'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여기 알지? 화장실이야. 자 이제 다음으로~"


그는 화장실 문을 열지도 않은 채 다음 문으로 향했다. 벽마다 세 개의 문이 붙어 있었다. 왼쪽에서 두번째의 문은 '숙소'였다. 이번엔 뭔가 가르쳐 줄 게 있는지, 그가 문 옆에 달린 카드 리더기에 어떤 카드를 긁자, 자동으로 문이 열리며 숙소가 나타났다.


"보다시피 여긴 숙소야. 현대적인 시스템을 쓰고 있기 때문에 어떤 카드를 긁냐에 따라서 방의 모습이 바뀌지. 여긴 내 숙소고."


형진의 숙소는 생각보다 단촐했다. 노르스름한 벽지에 아날로그 잡지가 마구 흐트러져있고, 침대 하나와 장롱 하나가 전부인 방이었다. 그는 문을 닫은 뒤 다른 카드를 긁었다. 아까처럼 문이 자동으로 열리며 다른 방이 나타났다.


이번에 나온 방은 벽지에 장판조차 깔리지 않은 텅텅 빈 회색의 골방이었다.


"여기가 니 방이야."


"장난하냐! 여기서 어떻게 살아!"


"하긴... 그래도 걱정하지 마. 상혁이한테 너네 집 데이터를 가져오도록 시켜볼게."


"찝찝한데."


그는 문을 닫고 내게 카드를 건네주었다. 카드는 현대의 그것처럼 하얀 플라스틱 테두리 안에 투명한 유리판이 장착되어 있는 식이었다. 유리판은 일종의 모니터 역할과 데이터 저장 역할을 동시에 했지만, 명함처럼 내 이름 석 자가 떠오를 뿐이었다.


"어차피 너밖에 안쓰는 방이니까 신경쓰지마."


우린 왼쪽에서 세번째 방으로 향했다. 세번째의 방은 거실이었다. 형진이 문을 열고 내부를 보여주며 말했다.


"여긴 그냥 거실이야. 밥 먹고 밥 하고 설거지 하면 되는 곳. 여기서도 배고픔은 느끼니까 먹어야 하잖아?"


거실은 싱크대를 포함한 ㄷ자 모양의 테이블이 서구식처럼 배치되어 있어서 보기 좋았다. '바'에서나 쓸법한 의자가 몇 개 배치되어 있었고, 조리하는 즉시 먹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거실은 상당히 좁았기 때문에, 이 테이블만 있어도 방이 꽉 차 보였다.


"다음은 오른쪽."


우린 거실 문을 닫고 오른쪽 세 번째 방으로 향했다. 탈의실이었다.


"여긴 시대에 따라서 옷도 바뀌는 신비로운 곳이지. 어차피 다 데이터니까 가능한 일이야. 상혁이가 이런 건 기막히게 잘한다니까."


탈의실로 들어서자 또 다른 복도가 나타났는데, 마치 목욕탕에서 '< 남탕  여탕 >' 팻말을 붙여놓듯 남성용 탈의실과 여성용 탈의실이 따로 있었다. 복도 가운데엔 '2001년 패숀'이라는 살짝 웃길법한 팻말이 붙어 현 시대를 알 수 있었다.


"나중에 또 와서 보라고. 다음 방으로!"


우린 탈의실을 벗어난 뒤 오른쪽에서 두번째의 방으로 향했다. 이번에 만나는 방은 통신실이었다.


"여기선 컴퓨터를 통해서 현실과 마주할 수 있지."


통신실은 거실보다 좁았다. 복도같은 폭에 컴퓨터가 겨우 들어갈만한 길이를 가지고 있었다. 딱 독서실 책상 하나가 들어가면 좋은 크기였다. 간단한 책상과 걸상에 컴퓨터와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가 있는 게 전부였다.


"이걸로 통신이 돼?"


"물론이지. 아직 네 계정을 안만들었으니까 나중에 시도해봐."


통신실 문을 닫은 우리는 마지막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맨홀 뚜껑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마지막 방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예진 대위! 정찰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또 개소리하시네요! 김예진, 거실로 돌격하라!"


"옛 설! 이 아니라, 이분은 누구지?"


13살 정도 되어 보이는 조숙한 소녀가 눈앞에 나타났다. 날카로운 눈에 어깨까지 닿는 머리를 한 그녀는 날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민형이라고 합니다. 헤헤."


"뭘 웃고 있나 이민형 일병! 자세가 바르지 못하다!"


"에, 네?"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차려! 열중쉬어! 차려!"


난 그녀의 명령에 따라 차려 자세와 열중쉬어 자세를 반복해야했다.


"이쁜척! 귀여운척! 셀카 찍었을 때 얼굴 작게 나오려는 척!"


"그게 뭐에요!"


"농담이야. 말 놓아도 되지? 난 김예진."


제대로 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난 대충 웃으면서 그녀와 악수했다.


"김밥 사왔으니까 좀 있다가 거실로 와. 맞다 형진아, 상혁이는 또 가져다줘야되냐?"


"응. 누나는 그냥 데워놓기만 해. 내가 갖다줄게."


"됐어 인마."


그녀는 형진과 대충 몇마디를 주고받더니, 이내 거실로 들어가버렸다. 우린 마지막 방의 문을 열었다.


"여긴..."


마지막 방엔 아무것도 없었다. 산속에나 있을법한 몇몇개의 작은돌과 흙들이 문 뒤를 이루고 있었다.


"아, 여긴 이게 아닌데."


형진은 난처한 기색을 보이더니, 연구실로 뛰쳐들어갔다. 잠시후 상혁과 함께 서둘러 돌아온 두 명은 돌과 흙으로 이루어진 벽을 살펴보았다.


"균열이 멈췄잖아. 어떻게 된 일이야?"


"아, 민형씨의 데이터를 아직 안넣어서 그래. 좀 있으면 원래대로 돌아올거야. 그런 점에서 민형씨는 식사가 끝난 뒤에 연구실로 좀 와주세요. 조사할 게 좀 있어서..."


"아 네. 필요하시다면야."


상혁이 돌아가고, 나와 형진은 거실로 들어갔다. 거실에선 예진이 준비한 편의점 김밥이 전자레인지에 데워져 김을 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


"편의점치고는 그럭저럭 먹을만하네요."


"아니, 우리 시대 편의점이 썩어 문드러져서 그런거야. 옛날엔 다들 착하게 장사했다구."


"그런가..."


난 속이 꽉 들어찬 김밥을 씹어대면서 2001년도의 신문을 읽어내려갔다.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고, 그것과 관련된 평화협정의 뒤를 우려하는 내용이었다. 애당초 다 쓸 데 없는 일인데도, 2001년의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신경쓰고 있었다.


김밥 그릇을 전부 비운 뒤 난 혼자서 연구실로 향했다. 예진에게 감사의 인사를 날리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계세요? 유상혁씨?"


난 연구실 문에 노크를 한 뒤 조심스레 들어가보았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거대한 '머신'이, 상혁이라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상혁은 머신 아래에서 슬금슬금 기어나왔다.


"아, 오셨군요. 이쪽으로."


그는 방의 오른편으로 날 데려갔다. 오른편엔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볼 수 없는 크기의 컴퓨터가 놓여져 있었는데, 모니터나 마우스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 한 올만 채취할 수 있을까요?"


난 내 머리카락을 한 가닥 떼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컴퓨터에 연결된 병 안에 넣더니, 병 밑바닥에 달린 버튼을 누르고 가만히 기다렸다.


5초쯤 지나자 그가 말했다.


"이제 됬습니다. 절 따라오시죠."


난 그를 따라 연구실을 나섰다. 우린 오른쪽 첫번째 방인 팻말없는 방으로 향했다.


"아까는 돌이랑 흙이 있어서 놀라셨을겁니다. 지금은 좀 다르지만요."


그는 문을 열어 내부를 공개했다. 아까처럼 돌과 흙으로 된 벽이 아닌, 검은 세상이 나타났다.


"여긴 도대체..."


"여기가 어른랜드의 균열입니다."


난 넘어지지 않도록 문틈을 잡은 뒤, 문 안쪽으로 몸을 내밀어 내부를 관찰해보았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완전히 검은 세상이었다. 여기서 왼쪽을 바라보면 방을 이루는 벽이 나와야 할텐데, 그런 건 예상외로 없었다.


"균열이 제대로 작동되나보네?"


거실에서 나온 예진과 형진이 우리에게 오면서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다보니 잘 되네요."


"잠깐만, 상혁씨. 그런데 이 균열이 왜 여기 있는거죠?"


"민형씨 그건..."


"그게 진짜 어른랜드로 갈 수 있는 방식이야."


형진이 상혁의 말을 자르며 중간에 끼어들었다. 균열에서 복도로 몸을 옮기자, 시야 오른쪽 아래에 전광판이 떠올랐다.


-Error code : 9981.5 (알 수 없는 접근)-


"방금 에러가 떴는데..."


"원래 그래. 9981.5 지?"


"응. 뭔가 알고 있어?"


"균열과 어른랜드는 다른 세계거든. 현실에서 어른랜드로 와야 하는데, 균열에서 어른랜드로 왔으니 에러가 뜰 수 밖에 없지."


"그게 뭔소리여."


"음... 이건 그림으로 보시는게 이해가 쉬울겁니다. 민형씨, 죄송하지만 다시 연구실로..."


"그럼 나도 이만 자러 간다. 수고."


"수고하마. 가시죠 민형씨."


민형씨라고 불리는게 나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좀 꺼림칙했다. 우린 다시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 안으로 들어오자, 상혁이 방 왼편에서 화이트보드와 싸인펜 몇 자루를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자, 여기가 어른랜드죠? 어른랜드는 현실세계와 균열의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안정적인 영역입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상혁은 화이트보드에 동그라미 두개를 그려놓았다. 그는 왼쪽의 원에 현실, 가운데에 위치한 원에 어른랜드라고 쓰더니 어른랜드가 쓰인 동그라미에 또다른 동그라미를 겹쳐 보여주었다.


"겹쳐진 부분에서 오른쪽이 진짜 어른랜드입니다."


그리고는 겹쳐진 두개의 원중 오른쪽에 '眞 어른랜드'를 쓴 그는 원이 겹치는 부분에 균열을 써넣으며 말했다.


"다시 말해서 이 균열 속에 진짜 어른랜드와 우리들이 있는 어른랜드로 가는 문이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죠."


"그럼 균열을 통해서 진짜 어른랜드로 가는군요."


"그런셈이죠. 저흰 진짜 어른랜드로 가야합니다."


"왜요?"


내가 물어보자, 상혁은 당연하다는 듯이 날 쳐다보았다. 내가 "농답입니다"라고 말하길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이건 농담이 아니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바이러스에 걸려서 갇혀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것 같군요. 민형씨를 데려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 설마 그 바이러스라는 게... 에러코드 337?"


"557도 있죠. 아마 형진이를 만나셨을 때부터 코드가 떠오르셨을텐데, 만약 그전에 로그아웃하셨더라면 정신이 육체속으로 온전하게 들어가질 못해서 정신병원 신세를 지고 말았을겁니다."


"아아..."


"하지만 이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치료할 백신이 아직 없습니다. 로그아웃을 못한다는 소리죠.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로그아웃을하기 위해서 여기 있는겁니다. 로그아웃을 하기 위해선 균열을 통해 진짜 어른랜드로 가야하고요."


"그런거였군요."


난 형진의 말을 듣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암실 밖에서 컴퓨터나 돌리고 있을 김민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를 위해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후. 죄송합니다만, 내일 설명을 마저 하겠습니다. 머신의 설비가 거의 끝나가고 있어서요. 내일 설명이 끝난 뒤에 머신을 돌려서 8년 뒤로 가보려고 합니다."


"괜히 바쁘신데 귀찮게 해드린 것 같군요. 상혁씨도 조금만 하시고 어서 주무세요."


난 상혁에게 인사를 한 뒤 연구실을 나섰다. 숙소 옆에 비치된 리더기에 카드를 긁고 숙소로 들어가자 아까와 같은 회색 방이 아닌 생각보다 온전한 형태의 방이 나타났다. 고등학교 시절 나 혼자서 지내던 곳이었다. 커텐은 있으면서 창문이 없는게 조금 어색했지만 침대나 책상, 자그마한 노트북, 심지어 앉은뱅이 탁상까지 전부 내 것과 똑같았다.


침대에 눕자마자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가상현실게임에선 잠에 드는 일이 없었는데, 결국 여기서 그 기록이 무너지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섬뜩한 기분이 전신을 감싸고 돌았다.


도대체 이 게임은 어떻게 만들어졌길래, 침대 옆 벽에 낙서된 글귀까지 똑같이 재현하고 있는건가.


...


......


다음 날이 밝자, 생각보다 오래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일어나보았다. 책상 위에 비치된 아날로그 시계를 바라보자 오전 11시였다. 난 아직까지도 피를 묻은 옷과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는걸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머리를 대충 정리한 뒤 숙소를 나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엔 변기만 있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목욕시설까지 완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난 입은 옷을 벗어던지고 샤워부터 하기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몸에 수건을 두른 채 탈의실로 향했다. 내가 벗어던진 옷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탈의실엔 엄청나게 많은 옷들이 있었는데, 난 흰 티셔츠와 흰 면바지를 입은 뒤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 안에는 김예진이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 일어났구나."


"아, 네. 뭐..."


난 의자에 앉아 예진이 내주는 음식을 받아들었다. 이번엔 김밥이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정식이었다. 흰 쌀밥에 계란 프라이, 대충 무친듯한 콩나물, 된장국이 전부였지만 이 정도면 양반인 처지라 난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언니는 생각보다 요리를 잘하시네요."


"여기에 없었을 땐 요리학원을 하고 있었거든."


예진은 설거지를 끝내더니 내 맞은편에 서서 테이블에 팔을 기댄 채 날 내려다봤다. 뭔가 음식을 집어들기가 껄끄러웠다.


"김예진의 초보자도 쉽게 할 수 있는 요리학원... 32살 같지 않은 작명센스지 않아?"


"평범한 것 같아서 나쁘진 않은데요."


"고마워. 내 친구들은 '니가 무슨 요리냐! 물주나 구해서 결혼이나 하지! 얼굴도 반반한게!' 이러던데."


"친구들이 아니라 친척들이 할 법한 말을 하는군요."


"그렇지? 난 결혼할 생각따위 없었는데..."


"그런데 여긴 어쩌다가 오게 되셨어요?"


"요리학원이 망했거든."


난 갑자기 밥을 옮기던 숟가락을 멈추고 말았다.


"망해가지고, 남은 돈이나 쓰다가 죽자고 생각한 채로 PC방을 들어갔지. 집을 팔아서 마련한 학원인데 망해버리고. 부모님도 옛날에 돌아가셔서 없는데다가, 친구들도 결혼을 하더니 하나 둘 씩 연락을 끊더라. 혼자가 됬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너무 외로워졌어."


그녀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더니 컵에 따라 내게 건네주었다. 난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PC방에서 무슨 대회를 했는데, 기억이 잘 안나네. 아무튼 그 대회에서 1등을 해서, 나한테 새로 나올 게임의 베타 테스트권이 주어졌어. 그게 바로 어른랜드였고. 난 어른랜드를 만드는 회사인 오토나소프트로 가서 테스트를 하겠다고 했지. 난 약간의 조사를 마친 뒤에 곧바로 암실에 갇혀버렸어. 그리고 잠시 후에 눈을 뜨니까 1996년. 지금의 너와 같은 나이인채 롯데월드에서 회전목마를 타고 있었지."


"언니도 놀이공원에서 시작하셨네요."


"그러게. 어렸을 때의 추억 중에 가장 좋았던 거라면... 항상 나와는 같이 있어주지 않았던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놀이공원이었으니까 그렇겠지."


난 서둘러 그녀가 준 음식들을 해치웠다. 그녀는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겨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러다보니까 형진이가 나타나더니 날 여기로 데려왔어. 옛날에도 비밀 아지트는 여기, 청량리였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마셨다.


"설거지도 끝났으니, 슬슬 연구실로 가볼까?"


"그러죠."


우린 거실에서 연구실로 자리를 옮겼다. 연구실에선 상혁과 형진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


"파워는 최대 출력으로 올리지 마. 8000와트로도 충분히 8년 뒤까지는 갈 수 있어."


"오케이. 대충 수치 맞췄고... 오, 제 때 맞춰서 왔군!"


"뭐야, 머신이 이제 작동하나보네?"


"그래. 8년 뒤로 가면 다시 수리해야겠지만."


"좋아. 시작하자 유상혁!"


상혁은 말없이 머신에 달린 여러 버튼과 레버를 건드려대기 시작했다. 머신에서 뭔가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머신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악! 눈부셔!"


내가 외쳤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눈을 감자 붉은 바탕이 나타났고, 그 가운데에 전광판이 떠올랐다.


-Who Are You-

  • profile
    하늘바라KSND 2013.01.12 15:54
    따끈따끈

    잘보고 갑니다~
  • profile
    bluesu1004 2013.01.12 21:03
    재미있습니다.
    왠만한 소설보다도 재밌네요.
    잘보고 갑니다~
  • ?
    미루 2013.01.13 03:37
    오오~ 재밌네요~~~!!
    잘 보고 갑니다~>ㅁ<
  • profile
    bluesu1004 2013.01.16 22:30
    아닛 이 좋은 글에 눈팅이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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