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세상은 암흑 구덩이였다 (여는 장 1)

by LHU posted Jan 3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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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내리었다. 적막한 어둠 속엔 아무 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 것도 없어보였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저기 너머, 무언가가 보였다.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순식간에 온 곳으로 퍼져나갔다. 불이다. 그러나 보통 불이 아니다. 세상 천지에 저런

빛을 뿜어내는 불은 없을 것이다.

 

불길하다. 저곳에 혹 내 동료들이 있을까 두렵다. 비가 거세지고 있지만 불은 꺼질 생각을 하질 않는다. 갑자기 비명 비슷한 소리가 내 귓등을 후려쳤다.

 

바람마저 세차게 부는 것 같다. 내 발길은 더 빨라졌다. 하지만 너무 멀다.

 

불은 내 앞에서 타오르는 듯한데, 걸어도 걸어도 길뿐이다. 내 발길은 더 빨라졌다.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더니, 아까 그 비명 같은 소리가 여러 번 들린다. 걸음을 늦춘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다. 불빛이 더욱 가까이 왔다. 갑자기 불빛 안에서 검은 것들이 튀어나온다.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다섯 개, 여섯 개. 그것들은 여러 방향으로 흩어졌다. 걸음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시체다. 나의 동료.

 

열 걸음을 걸었다. 또 시체다. 또 나의 동료. 눈을 감고 빠르게 10보를 걸었다. 눈을 떴다. 나의 친구.

 

또 눈을 감았다. 이번엔 천천히 열 걸음을 걸었다. 눈을 떴다. 뜨겁다. 또 나의 친구다.

 

눈을 감았다. 견딜 수 없이 뜨겁다. 눈을 뜨고 멀리 바라봤다. 수많은 시체. 나의 동료들, 나의 친구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빗물이 내 머리를 후두둑 친다. 고개를 들 수 없을 것만 같다. 눈 아래엔 빗물이 내려와 땅을 적시고 있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만 잔뜩 낀 채 비만 후두둑 내린다. 비는 내 얼굴을 후린다. 고개를 숙일 수 없을 것만 같다.

 

한참동안 그렇게 있었다. 그러다가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흘렀다. 무언가가 큰 소리와 함께 번쩍거리며 내 앞으로 왔다. 땅이 흔들렸다.

 

눈을 떴다. 비는 어느 새 그쳐 있었다. 내 얼굴엔 물기 하나 없었다. 그러나 하늘은 아직 캄캄했다. 아니 더 어두워졌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이다.

 

정면을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뜨거운 게 내 마음을 달구기 시작했다.

 

눈을 떴다. 빛이 보이지 않을것만 같던 하늘에 한줄기 빛이 보인다. 새빨갛다. 뜨거운 것이 내 몸을 훑었다.

 

주먹을 쥐었다. 견딜 수 없이 뜨거웠지만 펴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새빨간 빛이 내 몸을 정면으로 덮어왔다. 견딜 수 없이 뜨겁다.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그래도 눈부시다.

 

눈앞이 빨갛다.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졌다. 눈을 떴다. 밝은 빛이 온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 빛 아래 내 친구들이 고통스럽게 누워있다. 내 친구들이여.

 

 

 

 

오래 걸렸다. 그러나 힘들지는 않았다. 내 친구들의 마지막 안식처를 마련해주는 것이니 힘들어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나 때문에 그리된 친구들이었다. 내가 조금만 빨랐어도...... 눈을 감고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되뇌었다. 꼭 갚겠다고. 그렇게 난 친구들 앞에서 언제까지고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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