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어른랜드 #4

by 미양 posted Jan 1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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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게임

"마약 치료제 같은 건 없나? 아, 여기 있다."


현실에서는 없을 치료제가 이 기계에선 잘도 나왔다. 난 치료제를 10개나 뽑은 뒤 전부 형진에게 먹였다. 형진은 약을 먹더니 곧바로 곯아떨어져버렸다. 난 그 꼴이 너무 황당했으나, 일단 김예진을 찾아야했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선, 그 사람이 보낸 편지를 확인하던지 동사무소에서 사는 곳을 조회해보면 되는 일이었다. 아파트 입구로 가보니 형진이 사는 303호의 편지함에 엄청난 수의 편지들이 와 있었다. 난 편지들을 전부 꺼내서 다시 303호로 돌아갔다.


편지는 대부분이 광고였는데, 개중엔 이제 없는 가게의 광고도 있었다. 난 광고를 전부 휴지통으로 보내버린 뒤 몇 몇 편지들을 추려낼 수 있었다. 다행히도 편지를 보낸 사람은 김예진이었다.


하지만 편지에 쓰인 것은 김예진이라는 이름 뿐이었고, 실질적인 주소는 없었다. 그러고보니, 현실 세계에선 자기 집을 팔아서 학원을 꾸렸다고 했는데, 그 학원이 집은 아니었을까. 난 노원구에 있을 그 집에 가기로 했다. 형진은 아무리봐도 행동불능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단독 행동이었다.


...


......


지하철에서도 내 존재의 위험성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난 아주 평범하게 노원구로 올 수 있었다.


[이번 역은 창동, 창동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흐흠."


난 창동역에서 내린 뒤 조금 걷기로 했다. 날씨도 아주 따뜻해서 나쁘지 않았다.


북서울중학교까지 왔을까, 얼마 머지 않은곳에 전원주택이 하나 나타났다. 이때는 전원주택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완전히 요리학원으로 바뀌어서 못알아볼 정도였다.


난 주택의 벨을 누른뒤 한 10분을 기다렸다. 그제서야 한 여자가 버릇없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뭐야, 아직까지 안갔냐?]


"그, 그래... 우리 좀 만나서 얘기할까요."


그녀는 다행히도 내 부탁을 받아주었고, 난 그녀가 있는 집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사는 집은 상당히 넓었다. 전원주택 전부를 쓰고 있으니 그럴만도 했다.


"후, 그래서?"


"당신이 김예진씨 맞죠?"


"맞는데?"


예진은 예전의 순박함이 사라지고 검은 속옷만을 입은채 담배를 피우면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우린 서로 마주본채 소파에 앉았다.


"저 기억나세요? 이민형."


"니가 누군데?"


만난 건 하루 뿐이고, 그 사이 6년이 흘렀으니 알리가 만무했다. 난 예전의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머신 기억나시나요? 유상혁씨가 만든..."


"아~ 그거! 완.전 쓰레기."


난 밀려오는 화를 참기로 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신거에요?"


"뭐가?"


"에, 비밀 아지트에서 요리를 잘 하시던 그 김예진씨 같지가 않아서요."


"아, 그래. 원래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는 거란다. 할 말 다 했으면 슬슬 가렴."


뭔가 이상했다. 정말 예전의 김예진은 아닌 것 같았다. 6년이라는 시간이 사람의 생활을 이토록 뒤집어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은 뭐하세요?"


"보면 모르니? 30분 후에 나가야하니까 슬슬 화장해야돼."


"설마..."


"맞아, 난 창녀야. 3년 전부터 납치당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는데, 지금은 내가 좋아서 하고 있어."


예전의 김예진은 확실히 아니었다.


"현실로 가고 싶지 않아요?"


"현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날 비웃었다.


"장난하니? 내가 왜? 거기선 가진 게 아무것도 없잖아! 난 여기서 살다가 여기서 죽을거야. 그만 꺼져, 짜증나거든?"


하는 수 없이 난 그녀의 집을 나와야 했다.


...


......


마켓에 들러 햇반과 레토르트 카레를 산 다음, 303호로 돌아오니 저녁 8시였다.


"오, 어디갔다가 왔냐?"


형진의 말에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냄비에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았다. 예상외로 가스레인지는 잘 작동했다.


"너 예진언니 알지?"


"그... 사악한 년!"


내가 말하자 형진은 대뜸 화를 냈다. 그는 지금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서 윗몸 일으키기를 하던 중이었다.


"왜 그래?"


"그 여자만 아니었어도 아지트는 안전했어."


난 가만히 경직되고 말았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네가 사라지고, 기계는 폭발한 뒤에, 우린 3년동안 이곳을 적응해나갔지. 그러다가, 누나가 돌연 사라져버린거야. 위치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상혁이가 만든 기계에도 누나의 위치는 보이질 않았어. 누나는 나한테 '나 납치당함 도와줘'라는 문자만 날리고는 1년동안 모습을 감췄지."


"찾아보기는 했어?"


"당연하지. 누나가 살았던 노원구를 완전히 뒤져봤지만 누나는 없었어. 그리고 2004년 8월에 아지트로 누나가 나타났는데, 누나는 사람들을 몇 명 데리고 있었어. 누나를 껴안고 싶었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하고, 누나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연구실로 들어가서 제 2의 머신을 전부 때려 부쉈지. 난 상혁이를 데리고 재빨리 아지트를 나와서 여기로 왔어."


김예진이 데리고 온 사람은 누굴지 짐작이 잘 가지 않았다.


"상혁이는 여기서 저걸 만들고는 혼자서 아지트로 돌아갔어."


그는 컵라면 만드는 기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난 아무것도 의지할 게 없어서 그걸 시작했고, 누나는 2년 반동안 다시 사라져버렸지..."


"돌겠네, 그 때려부수던 사람들이 누군지는 정말로 모르겠어?"


"해커가 조종하는 엔티티들인것 같던데. 얼굴이 다 똑같았던게 기억에 남아있어."


"이건 뭐..."


그 때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번호는 알 수 없었다. 난 전화를 받아보기로 했다.


[아, 민형이니?]


"네, 예진언니인가요?"


[응, 아깐 미안했어. 너무 바빠서 말이야. 내일 한 번 더 오지 않을래? 맛있는 거라도 해줄게.]


"싫은데요 썅년아."


[뭐?]


난 전화를 끊어버린 뒤 곧바로 부수고 말았다. 난 부서진 전화를 휴지통에 넣은 뒤 레토르트를 냄비에,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이여, 역시 여자란 존재는 무섭다니까."


"그래서 여자들은 힘이 없잖아. 힘까지 좋으면 오버 밸런스니까."


...


......


다음 날이 되자 형진의 혈색이 아주 밝아져 있었다. 근육도 어느 정도 돌아와서 어제보단 봐줄만했다.


"그래서 갈거냐?"


"어제도 갔는데 오늘도 가면 예의가 아니지."


"하긴."


형진이 말을 마치자마자 누군가 세차게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난 누군가 싶어 문 가운데에 달린 도어 아이를 통해 상대방이 누군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네가 안 올 것 같아서 직접 왔어."


"헐."


문 밖에 있는 사람은 김예진이었다. 난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고, 그녀는 안으로 들어왔다. 형진이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


"뭐야? 여긴 왜 왔어!"


"시끄러워. 지금까지 숨겨준 걸로도 고마워 하는 게 좋을텐데....편지는 읽어 봤니?"


형진은 말이 없었다. 내가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로 여긴 왜 오셨나요?"


"아, 민형아. 어제 욕하던거 찰지더라. 아주 그냥 혀가 감겨."


그 말을 마치더니 그녀는 야한 혀놀림을 보여주며 웃었다. 상당히 기분나빠서 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누가 자꾸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더라고. 어젯밤부터 민형이 널 지키라고 하는거야. 그 녀석인가 싶었는데 그 녀석은 아니었고... 대체 누군지 모르겠어."


내 추측에 의하면 그건 김민호였다. 쓸 데 없는 일에 참견하는 건 좀 그랬지만 상황이 상황이었으니 이번엔 좀 고마웠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거에요?"


"어떻게 하긴! 현실로 돌아가야지. 밤에 자면서 생각해봤는데, 역시 이런 남루한 삶은 좀 아닌 것 같아."


"그건 좀 다행이네요. 그짓이 결코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좀 그렇잖아요. 일 자체가."


"그래도 난 저 사람이랑 같이 가지 않을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상혁이가 죽은 건 누나도 알고 있겠지?"


"무슨 소리야?"


형진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예진에게 그건 금시초문인 것 같았다.


"분명히 그 녀석이 말하기로는 상혁이가 머신 2호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이제 얼마 안남았다고도 했고..."


"상혁이는 죽었어. 게다가 2호 전개도는 나에게 있다고."


형진은 컵라면 만드는 기계에 '2호 전개도'를 쓴 뒤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서류들이 엄청나게 쏟아져나왔고, 서류들은 모두 머신 2호의 전개도를 그려놓은 것이었다.


"근데 언니, 아까부터 그 녀석 그 녀석 하시는데, 그 녀석이 대체 누구에요?"


"그 녀석은... 음, 뭔가 이질적인 존재야. 2007년이라는 시간을 완전히 무시하고 우리가 살던 때의 옷을 입고 다니고 있어."


그럼 해커잖아!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고, 형진의 머리에서도 나와 같은 생각이 돈 것 같았다.


"뭐야, 너희들은 그게 누군지 알아?"


"그 녀석이 해커야 누나! 그 녀석을 잡아야 돼!"


형진이 말을 마치자마자, 눈 앞에 전광판이 떠올랐다.


-해커가 슬슬 움직인다.-

-그커렇 게슬 는직안다돼.-

-그렇게는 안돼.-


"두 분은 메시지가 뜨나요?"


"응. 떴어."


"그렇게는 안된다고 하네."


메시지가 뜨고 10초가 지나자, 갑자기 집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집이 무너진다는걸 알게된 우리는 아파트를 빠져나와 아지트로 향했다.


...


......


"기계를 가져와서 다행이야."


아지트에서 굴러다니던 상혁을 균열 속으로 던져준 뒤, 우린 부서진 머신을 치웠다. 머신을 이루던 부품들이 싹 사라지자 연구실은 아주 넓어졌고, 우린 컵라면 만드는 기계를 사용해 머신 2호의 부품들을 제작하기로 했다.


부품은 전부 만들어져 있었고, 프로그램도 모두 코딩되어 있었기 때문에 머신 2호를 만드는 시간은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다만 기계는 못쓰게 망가져버렸고, 우린 머신 2호만이 돌아가길 기대해야했다.


-30분 후 점검이 실행됩니다.-


"점검크리라니!"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건데?"


둘이 당황해하자, 내가 말하기로 했다.


"현실에서 정모를 하는 장소가 달라지겠지. 집에서 정신병원으로."


-너희들이 만나니 게임이 아주 재미없어졌어. 이제 끝낼 시간이다.-


난 상혁의 방에 있었던 서류 중 마지막 장을 훑어보았다. 상혁은 마지막 장에 유서를 쓰는 것 외에도 머신 2호가 돌아가는 구조를 써놓았었다.


-머신 2호는 그냥 머신과는 다르게 시대를 과거로 돌린다. 서버컴퓨터가 허용하는 한 과거로 돌아가기 이전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전부 초기화시켜버리기 때문에 주의해서 사용할 것. 20살에서 정자로 돌아가는 게 얼마나 쉬운지 알려주는 기계이다.-


"이봐, 이민형. 뭐해?"


"아, 아니야. 슬슬 돌려볼까. 다시 2000년으로 가자."


난 머신으로 다가가 레버를 눌렀다. 머신이 돌아가면서 빛이 나오기 시작하자, 김예진이 돌발적인 행동을 하고 말았다.


"잘 가라... 백신."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탄환에 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당하고 말았다. 빛이 점점 더 밝아지고, 다시 2001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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